데이터 분석 기업에서 기획자로 살아가기 #1 — 하는 일들
주변 분들에게 미디엄이든 뭐든 해보라, 일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씩 적으면 그게 당신의 힘이 되어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을 쓰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해보다가, 결국 다소 진부할 수도 있지만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써보기로 했다.
2015년 7월,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처음 시작했다. 그 이후 2개의 회사에서 5년 정도 일을 하면서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첫번째 회사는 데이터 기반 마케팅 전략 컨설팅 에이전시였다. 거기선 컨설턴트였고, 번아웃+회사에 망조가 들면서 그냥 나온 다음 좀 쉬고 나서 2018년 입사한, 지금 다니고 있는 두번째 회사는 대충 데이터 분석 기업인 것 같다.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에 대해서는 구성원 중 누구도 쉽게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정도로 정체성이 모호하고 복잡한 데가 있는 회사다)
어쨌건 내 공식적인 직무는 ‘분석기획팀’의 ‘분석기획자’다. 내가 하는 핵심적인 업무들을 드라이하게 정리하면 대충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 온갖 프로젝트와 사업과 과제에 대한 제안서/보고서 쓰기와 PMO일. 기획자 중 이걸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딱히 서비스 기업이든 무슨 기업이든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실 IT 기업에서 PM이란 간지나는 총사령관보다는 실무자와 이해관계자 사이에 끼인 불쌍한 중년일 뿐인 경우가 많고, 실제로는 뒷바라지 하는 사람이 어딜 가나 있으니까.
- 이해관계자(사내/사외 갑)들이 하는 정돈되지 않은 얘기들을 듣고 논점을 정리하는 일.
“당신의 발언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들 같습니다만 그것이 맞는지?” 라는 것인데.. 대충 요구사항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sarcasm하게 얘기한다면 ‘주어가 없는 일에 주어를 부여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 냉소적으로 얘기하면 임의의 안건에 대해서
“플랫폼을 만든다고? 무슨 데이터에 대한 뭔 플랫폼을? 분석을 하겠다고 써있는데 뭘 분석한다는 거야? SNS 데이터와 모바일 트래킹 데이터를 융합적으로 분석한다니? SNS가 뭐냐는 뭐 보나마나 트위터일테니 일단 넘어가고. 모바일 트래킹 데이터가 뭔데요. 하겠다고 썼으면 생각이 있으니까 썼을 거 아니에요. 없다고요? 그럼 왜 써요? 아니 how 이전에 what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진짜 이게 무슨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앞에서 이렇게 해놓고 실무자들보고 제안서 써오라고 하면 이게 되나.. 아니 그냥 문서 토스해줄 거면 영업팀이 왜 필요해” 라는 말을 하는 업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차차 써보도록 하겠다. - 해야 하는 프로젝트(또는 어떤 사업)에 대한 개념적 데이터 모델링과 논리적 데이터 모델링 사이의 중간쯤에 있는, 업무를 분석하는 업무.
데이터 서비스건 데이터 프로젝트건.. 일단은 데이터가 있어야 뭘 해도 할 것이고 그것도 잘 구축이 되어야 뭘 한다. 그런데 이게 순수하게 DBA나 DE(Data Engineer)나 뭐 Backend 개발자의 일이냐.. 라고 하면 답은 ‘아니오’다. 대체 뭐에 대한 무슨 데이터가 어떻게 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 Define되는 것이 먼저고 기술은 그 다음 문제다. 요컨대 기업에 대한 데이터 플랫폼을 만들 거면 기업 데이터란 대체 뭘로 식별하는 데이터이며 속성은 뭐가 있고 도메인(제약사항)은 뭐가 있고 시계열 slicing은 어떻게 나와야 하고.. 뭐 이런 것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거. 보통 엑셀이나 hwp나 doc로 널부러져 있는 문서들과 씨름을 하고, 써있는 말이 이해가 안 되면 즉석에서 구글과 네이버를 뒤지든가 전문가한테 찾아가서 물어보든가 해서 끝끝내 이해를 해와야 한다. 그리고 그걸 기술인력이 이해가 되는 형태로 바꿔서 내보내 줘야 하고. 즉 어떻게 보면 사안 자체와 사안을 둘러싼 데이터에 대한 사내 검색엔진이 되는 것이다(…) 근데 재밌는 건 딱 여기까지만 하고 DB를 직접 만들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것. MariaDB가 됐든 뭐가 됐든 직접 만드는 일은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데이터 업무들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라는 주제로 다시 얘기해 보겠다. - 해야 하는 프로젝트(또는 어떤 사업)에 대한 기획적인 관점에서의 데이터 관련 미션 도출.
표현이 좀 어정쩡한데.. 결국 분류를 하든 예측을 하든 군집화를 하든 그냥 집계를 하든 나와야 되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같이 만드는 거다. 이해관계자들과 얘기하는 문제라기보단 데이터 인력들과 얘기하는 문제에 더 가깝다. 이를테면 ‘1개월 단위로 이런 분석을 해서 결과로 지수를 뽑을 수 있겠는지?’ 같은 것들. 보다 클래식한 관점으로 정의한다면 요구사항 분석 뒤의 요구사항 정의 내지는 기능 정의가 아닐까 싶다.이게 없는 상황에서 하는 것이 보통 데이터로 하는 일종의 차력쇼인데(데이터 인력 치고 전혀 무의미한 word cloud같은 거 구경 못한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요새는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서 이런 거 한다고 돈 못 번다. 뭐 따지고 보면 데이터 엔지니어란 말도 5년 전만 해도 한국에 없었으니까.. 여하튼 - 데이터 인력의 뒷바라지.
사실 대부분의 기업에서 데이터 인력은 실제로 정말 귀한 몸들이다. ‘분석가’(aka 데싸, 모델러) 는 대부분이 석박사고, 데이터 엔지니어들도 싼 몸이 아니다. 몸값들 살벌하고 워낙 시장이 원하는 직군이라 수틀리면 나가는 일도 흔하다. 그에 비해 나와 같은 기획자, 특히 ‘UX를 못 다루는’ , 완벽한 IT 서비스 기획자라기보다는 일반적인 기업의 ‘기획팀’에 가까운 멤버들은 사실 그렇게까지 인기가 없기도 하고 기술 경쟁력이 부족한 만큼 서당집 개 심정으로 일을 한다. 고객이 보내준 데이터 스키마가 실제 데이터랑 안 맞는 문제(솔직히 너무 흔하다), 스키마를 설명할 수 있는 업무 프로세스 관련 자료가 없어서 해석을 못하는 문제(이것도 너무 흔하다), 그 외에도 필요한 것이 안 넘어오는 문제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님 너무 귀찮으시죠 걍 DB 리드권한만 있는 계정 좀 줘요 자질구레한 건 알아서 처리하게” 한 다음 “엄.. 셀렉트.. 프으로옴.. 웨에얼… A 쩜 땡땡 이꼬르 B쩜 땡땡 이꼬르..” 하면서 필요한 데이터 바로 DW나 DM에서 뽑고, 엑셀로 보다가 생각도 정리하고, Power BI든 GDS(Google Data Studio)든 Tableau든 Kibana든 써서 시각화 좀 해서 살펴보기도 하고.. 이건 명시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라기보단 일종의 생존을 위한 부가업무들 같은 것이다. 연봉 1억짜리의 1시간은 연봉 3천짜리의 4시간 같은 것이니까…
생각해 보면 데이터 분석 기업에서 기획자로 살아간다는 게 뭐 다른 IT기업에서 기획자로 살아가는 것과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치여 사는 것도 똑같고 기획업무를 빙자해 온갖 것에 아는 체 하는 것도 똑같고 사실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도 똑같다. 뭐 사실 더하면 더하지 약하진 않다. 더군다나 데이터 업계는 전통적인 IT 스쿼드인 기개디+마케터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데이터 분석/데이터 구축 인력이라는 변수가 붙고, 알고리즘 문제 때문에 전체적인 학력 허들도 더 높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 역시 더 커진다. 고졸 15년차 산전수전 다해본 슈퍼 풀스택 고참 개발자와 포닥 출신의 박사 사이에 흐르는 정치적 대립 사이에서 학사 출신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한숨만 나오기 마련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데이터 업계에서 기획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텐서플로우를 쓸 줄 안다,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을 쓸 줄 안다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모두 수단이고 목적이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 데이터 업계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태초에 프로그래머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IT 업계에 온갖 직무가 난립하듯이 데이터 업계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일단 박사님 모셔오면 빅데이터로 대단한 거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끽해야 5~6년 전이다. 데이터를 구축하는 것과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이 다른 문제고 각각 전문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데이터 엔지니어와 데이터 분석가를 분리하려고 한 것도 아무리 멀리 잡아봐야 3~4년 전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이나 ‘빅’ 데이터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데이터가 문제고 데이터가 표현하는 경영적 컨텍스트가 무엇인지가 문제라는 것을 기업들이 지금 깨닫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뭘 할 것인가? 뭘 하기 위해 무슨 데이터를 쌓을 것인가? 무슨 데이터를 쌓아서 뭘 분석하는가? 분석한 결과를 어디다 쓰는가?
그런 흐름의 가운데에서 어찌어찌 살아가다 보면 재미있는 것도 보고 못볼 꼴도 당연히 본다. 데이터 인력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제도 있고, 기획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주제도 있다.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 조금씩 풀어가 보는 것이 미디엄을 다시 하게 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