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딩이 글쓰기를 연마해야 하는 이유

Ghost_0503
10 min readMar 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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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엄을 다시 시작하고 나서 한번 다뤄볼까 싶었던 주제가 있다. 회사에서 글을 써버릇 해야 하는 이유다.

데이터 분석 기업에서 기획자로 산다는 건 정말 문자 그대로 미친(미칠) 것 같은 얘기들을 하기 때문에 “네? 우리가 이걸 한다구요? 소는 누가 키워요?” 소리가 바로 튀어나오게 만드는 경영진(+임원)과, 보고 있으면 “아니 알긴 알겠는데”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기계어를 말하는 것 같은 엔지니어 사이에서 자체적인 텍스트 분석을 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말을 바꿔 전달하는 작업들을 하면서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뻑하면 Urgent한(그러면서 동시에 대부분 난장판이고 사업과 기술이 따로 노는 정도는 애교다. 아예 내용이 3/4 비어 있는 경우도 많음) 문서들 수습하러 뛰어드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몇일 전에도 문서 초안 보면서 “아 이거 노답인데..”하고 나와서 흡..하.. 흐읍.. 하면서 연초 연속 두대 피우고 작업했다.

하여튼 막상 내용은 아는 사람들이 도무지 글을 못써서 땜빵치는 글쓰기 노예로 불려다니다 보면 정말 답답해지는데..내가 기획자인지 컨설턴트인지 헷갈리는 부분 중 하나가 이를테면 기술적인 내용(그게 아키텍쳐건 파이프라인이건 모델이건)과 비즈니스를 접합시키는 과정에서 정말 많이 필요한 ‘자연어화’ 작업을 할 때다. 이런 업무가 다 나한테 쏟아지는 거 보면 진짜 맨파워 부족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여하간에 중소기업에 다니다 보면 절대적으로 맨파워의 부족을 실감하는 순간이 몇 개 있는데 1) 남을 쓰는 게 아니라 남에게 쓰임당하면서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는 PM 과 2) 일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닌데 믿고 맡길 수가 없는 사원 3) Stand-Alone으로 일처리를 못하는 과장~부장급을 볼 때다. 이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걸리는 첫번째가 글이다. 기본적인 글쓰기를 못 하면 회사에서 크게 네 가지를 의심받게 된다.

  1. (사원~대리) 기본적인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의심받는다. 이것은 사원일 때야 별 문제가 아니지만 대리(또는 대충 3+연차)가 되기 시작하면 급격하게 문제가 된다. 팀, 셀, 스쿼드 리더들은 대체로 불쌍한 존재들이고 간단한 건 팀원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길 바라지만, 글을 못 쓰면 일단 메일로 문의를 못하고 답변을 못하기 때문에 사고가 어떻게 날 지 몰라서 일을 맡기지 못한다. 그 일이 반복되면 1차적으로는 팀장이 본인을 상대로 격노하게 될 것이고 2차적으로는 언젠가 일어날 사고 때문에 내리갈굼이 날아올 것이다. 이 상황에 본인이 기본적인 글쓰기가 안되면 가정교육부터 의심받게 된다. “야 업무 메일을 이따위로 쓰는 놈이 어딨어! 내가 이것부터 가르쳐야 하냐!”
  2. (사원~대리) 안건에 대해 성실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인지 자체를 의심받는다. 안건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쩐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글이기 때문이다. 말로 할 때야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적당히 추임새 넣고 말 좀 보태면 이해도를 의심받지 않지만, 실제 회의록이라도 하나 써보게 하면 답이 안 나오는 케이스가 적지 않다. 글은 하늘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쓰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암묵적인 전제나 지식이 없어도 이해가 가야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말로는 한 두 마디면 끝날 일도 글로 쓰면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걸 캐치를 못하면 최소한도의 자율성을 가질 수 있는 대리 직급을 딸 수가 없다(물론 현실은 연차 먹으면 시켜 준다). 사람들은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는 게 아니라 남이 손으로 한 일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 그래서 글로 뭔가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사원~과장) 내 일을 만들기가 어렵고 내 실력을 의심받는다. 업무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설명이든 제안이든 보고든 상대방에게 내 업무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게 팀블로그가 되면 팀의 업무와 역량을 불특정 다수에게 대외적으로 어필하는 것이고, 개인 채널이 되면 퍼스널 브랜딩을 하는 것이며 대내 업무면 이 업무에 대한 내 지분(내지는 숙련도와 이해력)을 타인이 측정하는 도구가 되고 대내-대외간 업무면 회사의 얼굴이 된다는 뜻이다. 방향이 잘못된 건 고치면 되고 코드가 잘못된 건 디버그하면 되지만 이게 뭔지, 왜 이렇게 했는지를 글로 설명을 못한다는 건 실력을 필요 이상으로 저평가받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되었다’ 같은 식의 설명을 하는 사람에게 일을 Turn-key로 주는 건 불가능하다. 실제로 디자인이 됐건 개발이 됐건 그것 자체에 대한 실력이 괜찮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런 실력이 있다는 것을 겪어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감이 오게 문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잘하는 사람 대비 숫자가 훨씬 적다. 수많은 ‘포장만 잘하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포장이 앞선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가 한 일을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어도 최소한 불필요한 마이너스는 안 겪는다. 남들은 플러스에서 시작하는데 나는 마이너스에서 시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4. (대리~과장) 복잡하고 구조화되지 않은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의심받는다. 있는 숫자 리포트 하면 되는 아주 안정적인(동시에 부가가치가 없어서 파리목숨이 되기 쉬운) 일이라면 모를까, 전략적으로 벌이는 사업에 인볼브되는 인원은 수많은 돌발적인 문제들을 겪게 된다. 이런 경우 조직 차원에서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어떤 상황인가?” 를 점검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구두로는 답이 안 나오고 문서로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복잡하고 구조화되지 않은 문제의 배경과 메커니즘, 가용 해결책에 대해서 어떻게 에임을 잡을 것인가? 글을 어느 정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일단 줄글로 내용들을 정리해 보고(또는 정리하면서) 그 사이의 관계를 숙고한다. 그러나 글을 못 쓰는 사람은 둥둥 떠다니는 것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결국 헬프를 치는데, 헬프를 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헬퍼로 들어온 사람은 그것들을 전부 구조화시켜줘야 하므로 정말 죽 쒀서 남 주는 꼴밖에 안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그냥 쟤는 방해만 되니까 저리 치우고 내가 직접 정리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온다. 다음은 뭐겠나? 최소한 팀장의 짜증이고 심하면 정말 업무에서 아웃당한다.
  5. (과장~) 규모가 크고 여러 이해관계자가 개입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심받는다. 규모가 크고 이해관계가 복잡한 일일수록 통일된 Perspective와 질서있는 업무진행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물론 본인이 임원 쯤 되면 그냥 야 이거 고민 좀 해봐 하고 집어던져도 잘난 사람들이 알아서 쳐오겠지만, 임원도 뭐 본인이 을인데 갑이 있으면 예예 그러믄입쇼 하는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는 글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총체적인 ‘문서’ 기술이 중요하다. 큰 일일수록 문서는 그 자체로서 인볼브된 인원끼리의 계약서 같은 기능을 한다(사실 계약서도 문서다). 이 단계까지 왔으면 문서를 못 쓰면 일반적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고(아주 실력이 좋다면 살아남긴 하겠지만, 본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더 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문서를 내용적으로 잘 굴리는 측면이 더 중요해지지만 이것도 맞춤법이나 워딩 같은 기본기는 되어야 한다. 이게 안 되면 문서화를 못 한다는 얘기고 문서화를 못 한다는 것은 물리적 에셋(그게 업무정의서가 됐건 메뉴얼이 됐건 산출물이 됐건 마찬가지다)을 못 낸다는 것이기 때문에 PL급 이상의 역량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치명적이다.

이 주제 나올 때마다 누누히 하는 얘기지만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무슨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란 얘기가 아니다. 첫번째로 표정이나 손짓 같은 비언어적 제스쳐가 없어도 내가 한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두번째로 히스토리나 컨텍스트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나나 내가 몸담고 있는 어떤 조직이 한 어떤 일, 또는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세번째로 그것들이 TPO(시간/장소/상황)에 맞게 돌아가야 하는데 이걸 위해서 필요한 것이 기본적인 글쓰기 능력이라는 뜻이다. 미묘한 워딩으로 기대치를 높이면서 살 길을 연다든가 하는 건 대부분의 주니어가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냥 있는 거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으면 끝이다. 그것만 해도 의외로 사내 동급 인력 중 평균보단 확실히 나은 위치에 설 수 있다. 내 경험상 글쓰기는 그 중요성에 비해서 실제로 기본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연마해 두면 반드시 써먹을 날이 오는 회사생활 제1의 리버럴 아츠다!

다만.. 회사를 들어온 시점이면 솔직히 글쓰기의 기본기를 연마하기엔 너무 늦은 시점인 것도 맞다. 머리가 굳었단 말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거기에 쓸 시간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아니 까놓고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럴 시간이 어딨나. 그래서 속성으로 연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대략 이런 선택지가 있다.

  1. 팀장에게 물어본다 : 본인이 본인 업무를 제대로 하고 있다면, 이런 글과 워딩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팀장 입장에선 매우 기껍다. 팀장에게 제일 도움되는 사람이 방향 잡고 시간 만들어 주면 보고 자료까지 따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니어 본인이 보기에 팀장이 글을 좀 쓰는 사람이면 팀장에게 짬짬이 내가 이런이런 정리를 하고 싶은데 글을 잘 못 써서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고민이라고 머리 긁으면서 물어보면 “야 니가 고민해야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팀장이 시킨 정리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될거라는 건 잘 아실테니 넘어간다(이건 1이 아니라 2부터 시작해야 함).
  2. 돌아다니는 것 중 글솜씨가 괜찮은 메일이나 문서의 표현을 내 상황에 맞게 베껴 쓴다 : 이걸 무슨 저작권이 있어서 안 되는 사안이라거나 쪽팔리는 짓이라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업무에 관련된 글쓰기의 반은 모디따는(Modify에서 유래한 은어) 짓이지 제로부터 쓰는 게 아니고, 사실 제로부터 쓰는 사람들도 탭에 다른 문서 몇개씩 깔아놓고 표현이나 문장들 베끼면서 쓴다. 기본적으로 레거시 문서라는 건 승인이 됐으니까 돌아다니는 문서다. 그러니까 괜찮은 표현이나 워딩, 문장, 문단 구조들을 베껴 쓰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투입 대비 성과가 좋은 접근 방법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건 CTRL+C+V가 아니라 직접 써봐야 한다는 거다. 다른 문서는 꼭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 같지 않다. 무턱대고 복붙하다 깨지는 사람 정말 여러 명 봤다. 베끼더라도 자기 손으로 직접 쳐보면서 자기 상황에 맞게 써보는 것을 여러 번 하면 자기 나름대로 업무 관련된 글을 쓰는 쿠세와 접근 노하우가 생긴다. 이 짓 여러 번 해보면 써야 할 때 문서들 보면서 이건 사이즈 나온다 안 나온다 같은 게 감이 잡히고 대충 100점 만점에 70점까지는 속성으로 갈 수 있다. 정말 강조하지만 글에 익숙하지 않은 주니어들은 일단 잘 된 문서를 베끼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
  3. 내 업무에 대한 글을 뭐라도 좋으니까 아무렇게나 써본다 : 이건 업무 자체를 쳐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기본기를 연마하는 방법이다. 글쓰기에 대한 수많은 방법론과 노하우가 있지만 실제로 그걸 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아무거나 좋으니까 본인이 짠 코드에 대한 설명이든, 본인이 업무 하면서 느낀 것이든 뭐든 딱 500자 이상만 1주일에 최소 1번씩 써보자. 이것도 안하고 글을 잘 쓰기를 기대하는 건 정말 무리다. 문체도 상관없고 양식도 상관없다. 그냥 한 일, 공부한 것, 느낀 것.. 무엇이든 상관이 없으니까 일단 쓰자는 거다. 그지같은 팀장이나 임원 욕하는 것도 괜찮고, 말 안듣는 팀원 고쳐쓸 방법 궁리도 괜찮고 뭐든 괜찮다. 글쓰기가 버거운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글이라는 것을 내기 위해 필요한 ‘기획력’이 부족한 것이므로 뭔가 생각을 하는 것에 적응을 해야 한다. 뭐라도 써보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이게 왜 속성이냐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기본기부터 하면 진짜 힘들다. 그냥 아무거나 생각나는 거 쓰는 것 만큼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이건 쌩 주니어는 벗어난 3년차 이상을 위한 것인데.. 대리급 이상 정도 되면 본인이 글을 못 써서 생기는 일에 대해 일이나 잘하면 됐지 뭔 이런 걸 시키느냐며 본인이 글에 대해 느끼는 부담감에 대해 억지로 업무 R&R 문제인 것처럼 자기최면을 걸기 쉽다. 그러나 대리쯤 되면 이제 본인이 부담감을 털 수 있을 만큼 글쓰기 능력을 키우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시점이고 점점 더 그런 일들이 많아지면 많아지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당장 제안서며 보고서며 본인 아니면 누가 처리해줄 것인가? 팀장이? 팀장 입장에서 그거에 인볼브 못하는 사람을 높이 쓰고 싶은 생각이 들까? 어지간히 맨파워 딸리는 회사 가면 정말 실무 깡통인데 글만 좀 쓰는 사람들이 차부장 달고 있는 거 볼 수 있는데 그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니까(좋은 현상은 아니다. 막상 겪어보면 이런 사람치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다. 내용을 이해하고 모디를 따야 하는데 이런 인간들은 닥치고 대충 끼워맞춰 놓는 바람에 사실 손이 더 감) 기본 실력은 빨리 갖춰야 한다. 나는 엔지니어라 그런 거 못해요, 나는 연구논문만 썼지 제안서 이런 거 못해요.. 그런 거 좀만 시간 지나면 안 통한다. 그런 걸 떠나서 팀장이 없어도 일정 수준은 자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그러기를 요구받는 것이 3년차 이상이니 정말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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