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 회귀, 2.5회차, B2B, 데이터, 반복되는 모험과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Ghost_0503
52 min readDec 3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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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얼마 전에 했던 얘기를 기반으로 전체 스토리를, 다소 민감한 부분들을 빼고 다듬어 올린다.

2018년, FA였던 나

2018년으로 시점을 되돌려 보겠습니다. 3명이 있던 회사가 18명이 될 때까지 있었지요. 그런데 사실 그 회사는 굉장히 니치한, 수요를 만들어 내야 하는 일을 했던 회사였어요. 그리고 그 회사만의 특수성이 가진 어떤 고질적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지쳐갔어요.

그래서 제 사수였던 조직장이 퇴사를 합니다. 저는 당시에 첫번째 회사의 에이스 소리를 듣던 사람입니다. 감사하게도 제 윗분들이 그렇게 바라봐 주었지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그랬지만 그렇게 멘탈이 단단한 사람은 못 되었습니다. 이 때의 NEP는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도 좀 더 순박한, 그냥 윗 사람들의 도전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에+그리고 그걸 해야 하기에 그걸 했던.. 뭐 이런 느낌의 인간입니다.

J님과 비슷하지만 좀 더 추상적인 장르의 일을 보다 문과적으로 수행했고 (상황적 특수성에 의해) 해당 상황에서 좀 더 높은 평판을 윗사람에게 받았던 캐릭터랄까요? 아무튼 저는 이 공백을 견딜 방안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저도 나름대로 쉬고 싶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선퇴사를 지릅니다. 약간 뭐라도 하겠지, 그런데 이건 더는 안될 것 같아.. 뭐 이런 생각이었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튼 퇴사를 했다 정도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데이터 일에 발을 들이다

2018년에 여러 일들이 있었고 저는 4달 정도 놀다가 지인의 권유로 데이터쪽 일을 하는 회사에 입사하게 됩니다. 이 회사는 태생적으로 스타트업보다는 구시대 SI회사였습니다. 그래서 투자를 받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월급을 우리 스스로가 지탱한다는 인식이 적어도 구성원 중 1/2에게는 있는 회사였습니다. 구성원들도 올드한 면이 강했어요. 아무튼 그 사이에서 저는 진퉁 SI 환경에 노출되지요.

아무튼 당시의 제 회사는 대표가 3명인, 유비, 조조, 손권이 한 회사에 있는 형국이었고 제 보스는 C레벨 직함을 가진, 사마의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주는 경험도 많았고, 꽤나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포커페이스가 강한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비와 조조와 손권이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려면 거의 필수적인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저는 지금처럼 내가 하는 일의 방향성이 어느 정도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적수공권이었습니다. 첫 회사와 두번째 회사의 하는 일은 아주 크게 달랐어요. 그럼에도 아무튼 어떤 방식으로든 저는 그걸 극복해 갔습니다. 그 결과, 저는 나름대로의 입지를 짧은 시간에 만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성장했다면 성장했지만, 사실 뭐 그 당시엔 그런 체감은 없었습니다. 제 기준에선 성장이 아니라 그냥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필요한 것을 익히고 적응하는 것뿐이고 제가 포랩에서 적응해 가는 과정도 대충 그런 식입니다.

저의 당시 팀장도 디자인 베이스였습니다. 다만 프로덕트라고 말하기엔 좀 그랬어요. C님/K님/L님과는 좀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에이전시에 있을법한.. 본바탕은 디자인인데 하는 일이 기획이다 보니 디자이너의 시선에서 기획을 이해하고 다루는.. 뎁스는 높지 않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해 상황을 풀어내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죠.

그리고 제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하다 온 사람이었고 아무런 레퓨테이션은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첫번째 회사에서 했던 방식에 두번째 회사에서 필요한 것들을 담아 뭔가를 꾸려낸 결과물이 레퓨테이션이 되었고, 제 팀장도 저를 그 지점에 있어서는 좋아했습니다. 제 보스의 회고에 따르면 저는 처음 입사했을 때는 그냥 대충 문서나 쓰게 하려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 그런 레벨이 아니어서 바로 낚아채왔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그런 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편의상 K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 이 분이 나중에 들어옵니다. 영업기획자랄까, 그런 JD 하에 이적해 온 분이었죠. 과거 회사에서 배울 게 없었거든요. 이분은 진짜 찐 문돌이셨어요. 마케팅 하다가 영업관리 쪽으로 왔다가 우리 회사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데이터 플랫폼이라는 꿈

그리고 당시의 보스님은 어떤 종류의 데이터 플랫폼을 만들어내겠다.. 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로 치면 우리가 최근에 주목하는 O 솔루션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백데이터와 공공 데이터들이 버무려져 있는, 산업과 시장을 조망하고 분석하여 비즈니스적 인사이트를 투자사와 전략팀에서 얻어낼 수 있는 어떤 물건이었습니다.

우리로 치자면 우리 도메인을 대표하는 회사들의 서빙 데이터가 다 있고 여기에 공공 데이터와, 다소 입수하기 어려운 어떤 데이터까지 결합하고 그것들을 BI로 조망해 시장의 현상을 이해하고 유망주들을 탐색해낼 수 있는, 즉 우리가 ‘Y사가 급성장하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고, 지금 어떤 카테고리가 잘 되고 있다는 판단도 할 수 있으며, 무엇이 잘 되고 있지 않고 그것이 산업이나 경제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악마적인 매력을 가진 물건이었지요. 방향이 현재의 우리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미래의 여러 결말들 중 하나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 개념이 처음 나왔던 5년 전과 동일하게 완성되지 않은, 문서에만 있는 개념이자 듀크뉴켐 포에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게임 체인저였습니다. 제 기준에선 제가 지금 다루는 것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임팩트를 갖고 있었던, 동시에 제 취향에도 매력적이었던 꿈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19년에 자신의 회사로 오라는 전 사수의 제안을 거절했어요. 이걸 만드는 것에 있고 싶었거든요.

적어도 셋은 그랬습니다. 왜냐면.. 이것 자체에 가슴이 뛰는 부분도 있었고, 우리는 우리의 월급을 스스로 감당하는 현장에 있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겹고 힘들단 말이죠. 데이터 분석 SI 회사에선 당연히 데이터 엔지니어와 분석가가 우선이고 사람들은 프로젝트에서 좀 구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경력이 만들어집니다. 그에 비해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세 사람은 이 과정에서 커리어를 망치게 되는 그저 땔감들에 불과했지만, 그 땔감이 나름대로 꾸었던 꿈이 그랬던 것입니다.

아무튼간에 명목상으로, 이걸 만들려면 보다 전사적인 관리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한 수족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보스는 몇년 전에 저와 제 팀장, 그리고 K님을 모아 어떤 팀을 만들어냅니다. ‘데이터 플랫폼을 디자인적으로 기획하는 사람’과 ‘데이터 플랫폼의 워킹 메소드를 생각하는 사람’과 ‘데이터 플랫폼의 팔 거리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명목으로서요. 아무튼 이 팀의 탄생과 함께 우리는 수많은 프로젝트들을 메이킹하고 관리하고 보고서를 쓰면서 살아가며 보스의 수족과 같이 움직여 주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몸담은 회사는 지금 제가 몸담은 회사보다 더 레거시한 회사였고 당시의 환경이란 게 코로나 때처럼 스타트업들이 돈을 빵빵 투자받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밥값을 하면서도 그것을 만들어야 하는 기형적인(동시에 흔하디 흔한) 환경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회사들은 솔루션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없습니다. 솔루션은 문서 상에만 존재합니다. 실제 솔루션은 그때마다 만들죠. 그래서 우리는 그래서 실제론 뭘 했는가? 사업관리와 제안서와 보고서입니다. 기술회사의 논 엔지니어가 다 그렇게 살게 됩니다. 힘들었죠. 사업관리라는 업무는 너무나 큰 업무였지만 그 업무는 커리어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업무입니다. 제안서가 경력이 되지는 않죠. 정부과제도 개인의 커리어는 되지 않고요.

아무튼 그 삶을 지탱하는 것은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다는, 대단한 걸 만들어 내서 우리의 삶을 좀 더 낫게 만드는 과정선상에 있다는… 그런 꿈이었죠. 사실 이 회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노동력에 비례해 창출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행 인력은 늘어나지만, 관리 인력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즉 입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힘들어집니다. 그 과정 속에서 회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을 했습니다. 즉 회사의 성장 자체가 피와 땀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것들 중 상당수는 우리의 땀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꿈을 대충 2년 정도 셋 다 꾸었지만, 그 꿈은 2년 뒤부터 점점 침몰하기 시작합니다.

꿈은 어떻게 퇴색되는가

이 괴물은.. 적어도 우리가 다같이 꿈을 꾸던 시기에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보스 머릿속에 있는 플랫폼이 워킹하기에는 우리 데이터는 모두 각각의 약점이 있었고 아무리 절묘하게 결합하더라도 완성시킬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우리의 기술력은 그 데이터의 약점을 덮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타겟하는 산업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 역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에겐 그런 결론을 얻을 수 있을 만큼 투자할 자원이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 3명도, 우리 사업부도, 우리 회사도 다 여기에 올인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플랫폼이라는 명분을 갖고 만사를 그런 플랫폼과 이을 수 있는 또다른 말들을 만드는 것을 했을 뿐, 그것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도전할 능력도 여력도 사실은 없었습니다. 모 국책기관과 얘기하던 순간이 전형적이었네요. 돌이켜 보면 네이버가 국세청과 손을 잡아 만들어보려고 하고 정권이 밀어줘야 하는 것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은 곧 일종의 진공이자 부유하는 상태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2년을 지내오면서 3년째에도 여전히 그 단어들을 계속 썼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어요. 그것들에 관련된 개념적인 어떤 것은 존재했지만 사실 그뿐입니다. 우린 그것을 만들어내는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슬슬 깨달아 갔습니다. 꿈이 퇴색되는 순간이었죠. 셋과 보스는 한 팀이었지만 일심동체가 아니었고 각자의 이해관계도 사실은 다 달랐습니다. 그 지점, 적어도 세 명의 지점은 꿈이 연결해 주고 있었지만, 꿈이 점점 빛을 바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이상 우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선 저를 보죠. 제 일과 제 시선을 정의할 수 있는 Typical한 용어는 없어요. 저는 3년 반의 생활을 통해 기술과 데이터와 기획이 이상하게 버무려져 잡탕이 된 기형적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동시에 순진했던 면모들이 없어지고 차가움과 찌들어 버린 면모들이 자리잡았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제가 하는 모든 일과 작업 그 자체는 손쉽게 대체될 수 있습니다. 전문성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 지점을 감추고 존재의 의의를 찾기 위한 집념과 잡기술만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들을 제가 생각하는 가장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타이밍마다 배치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하나의 맥락을 갖고 있게 된 것이고..

이것은 직관적이지 않지만 팩트입니다. 제가 한 모든 일들은 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H님/J님/S님 + BE개발자들은 이 코어를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건 콜럼버스의 달걀과도 같습니다. 실제 컨셉트를 자세히 보면 지저분할 뿐 그리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단지 그 시점에 그런 형태로 그것이 나와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고, 병귀신속(兵貴神速 : 군사를 움직이는 데는 속도를 귀하게 여긴다)의 덕목이 있는 것이죠. 그 시점에 그런 형태로 나왔고, 우연찮게 그것이 우리 인프라가 원래 해줄 수 있었던 진짜 성능을 발현하는 도구가 되었고, 또 우연찮게 그것이 H님의 통합에 필요한 마지막 한 조각이었던 것이고, 지금 시점에는 그것을 기반으로 응용할 수 있는 BI적 컨텐츠, 비즈니스적 룸, 테크 레이어에서 시스템적으로 그것을 소화하는 여러 방식들이 고민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저라는 사람이 쉽게 대체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다만 그것이 이 일이 전문적인 것(기술적/기획적 해자가 있는 것)으로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감춰주진 않습니다.

그래서 3년 뒤에도 우리 회사가 살아남았다, 정확히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발견하고 정말 커졌다면 피봇을 하든 정말로 성공했든 제가 생각하는 많은 모순이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었을 것인데, 아마 그 스테이지에서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조금이라도 보여주었던 어떤 미덕들은 회사의 스테이지나 방향이 바뀌면서 줄어들겠죠. 그래서 그 자리에는 결과적으로 제가 없을 확률이 50%는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의 흐름 속에서, 저는 이방인이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살아남은 먼 미래에 저는 회사의 어떤 과도기적인 면에 있었던 사람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어쨌건 저는 이 거대 플랫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습니다. 제 이력서는 망가졌고 제 시장에서의 포지션은 없었습니다. 물론 회사와 보스는 저를 존중했고 진급 대상자이긴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벤트가 발생하고, 그 결과 제 스스로가 더이상 회사를 다닐 수가 없어졌습니다. 이미 금이 간 상태였는데 한계를 넘어갔기 때문에 부서져 버린 것이죠. 그래서 미리 염두에 두고 있던 회사로 이직하는, 즉 미래에는 정리해고로 이어지는 카드를 사용해 회사를 그만두게 됩니다. 이것도 참 웃기지만.. 아무튼 3년 반의 제 첫번째 회차는 끝났습니다.

전 지금 하는 종류의 업무적 관찰이나 판단에 따른, 즉 필요에 의한 발언이 아니라 순수하게 지난 시간에 대한 분노와 환멸감, 미래에 대한 여러 두려움 속에서 차서 여러 가지 말을 했었습니다. 참 저도 미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말을 하고. 뭐 그렇게 나쁘게 끝났는가,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나름대로의 쏟은 시간에 의한 유산과 서로에 대한 미안함들이 있는 거죠.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는 아무래도 좋은 일입니다.

당시의 팀장은 원래도 커리어의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년배가 H님이나 C님인데, 이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죠. 기술회사에서 디자인 베이스의 사람이 회사의 핵심부에 자리하기 위해서는 업과 기술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와 사람과 사물에 대한 통찰력, 인내심, 거기에 직군의 평균을 넘어서는 강력한 다큐멘테이션 능력까지도 간간이 요구됩니다. 즉 불합리할 정도로 많은 덕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C님이 C레벨인 이유고, 동시에 그런 사람의 의지나 방향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제가 팔로워십을 발휘하려고 애쓰는 이유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당시의 팀장은 이런 덕목들이 (히스토리컬한 맥락에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일을 쳐내거나 큰 틀에서 협의할 수 있을 뿐 일을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여건도 능력도 아니었고, 디자인 베이스 인력의 최종적 미덕에 가까운 ‘제품’이나 ‘시각적 경험’ 그 자체를 뎁스있게 디자인해낼 수 없었던 지점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이건 제가 디자이너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 주세요. 제 표현이 그렇다는 거고 대충 어떤 얘기인지 뉘앙스가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디자이너가 SI와 사무업무를 통해 뿌리를 잃고 왜곡되면 대부분 그렇게 되는 거 아닐까 싶어요.

그는 당연히 저보다야 한 분야의 전문성은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포지션이 그 레벨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강력한 전문성과 레퍼런스를 요구했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애초부터 뿌리가 없고 상황에 맞춰서 제가 가진 것들을 일부는 확장시키고, 일부는 과거의 것을 끌어오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만약 크루들이 저라는 사람을 어떤 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그건 제 이력서가 아니라 저라는 사람의 시선과 행동으로부터 일관성을 발견해 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어떤 면에선 저보다 더 외부에서의 경쟁력이 없었고, 나이도 많았기에 이제 이동이 불가능했습니다. 본인도 알았어요. 이제는 큰 변화나 도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요. 나름 오래 머물렀고 조직에서도 (호불호는 갈렸지만) 인정을 받고 있었던 저의 이탈과 함께 촉발된 조직개편 속에서 그는 진급하였지만, 동시에 이 사람은 이제 이 회사의 맥락 속에서 기능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도 여러 미래가 과거에 있었지만 그 미래들은 닫혔습니다.

그리고 K님은 저보다 1년 반을 더 버텨냈지만, 결국 그 분은 모순에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팀장에 비해서 훨씬 비IT적이었고 비 데이터적이며 순수하게 추상적인 영역의 업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일은 본질적으로 조직적인 서포트를 받아야만 하는, ‘꿈꾸는’ 일과 ‘설계하는’ 일이 혼재되어 있고 그 사이에서의 위험한 어딘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저처럼 N가지 범위를 조잡한 방식으로 연결해 순간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트릭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즉 변수도 창출해 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은 그녀의 발목을 너무나 잡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회사는 회사의 성장과 그분의 넥스트가 공존할 수 있는 형태의 그림을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 지점 역시 우리 회사의 많은 시니어들에겐 낯선 부분이겠네요. 다만 이런 일은 저같은 프로젝트와 B2B에 얼룩진 환경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에겐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수주를 통한 회사의 성장은 대부분 누군가의 희생을 동반하고, 기술회사의 성장은 기술인력의 커리어 성장과 부분적으로 공존하지만 비기술인력에게는 뭔가를 남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회사가 일방적으로 그녀의 노동력을 소비했을 뿐 그녀는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무튼, 막판의 그분은 그 주제가 아닌 눈앞의 주제들에 몰두했습니다. 희망이 더는 없었기에 뭐라도 이력서에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 회사에서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그 이전 회사들로부터 이어지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저보다 늦게 합류해 좀 더 버텼지만 끝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 3년동안 회사는 계속 흑자로 CAGR 40%씩 성장했으며 인원은 그 시절 대비 거의 2배가 되었고 보스님은 이사에서 전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플랫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겠죠.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의도되지 않은 것이든요. 그 과정에서 이 3명이 꿈꾸었던 더 나은 자신들의 미래 중 대부분은 완전히 닫혔습니다. 셋 중 그나마 변수가 남아있던 저만이 다른 미래를 선택했고, 잠깐의 스핀오프를 거쳐 현재의 턴으로 왔습니다. 3번째 회사는 저에게 있어서는 돌발적인 나쁜 이벤트에 가깝게 끝이 났기에 별로 길게 언급할 가치는 없겠고요.

2.5회차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가

그리고 제가 우리의 솔루션으로 예전 일을 비유할 수 있다는 건 결국 제가 해왔던 일과 꾸었던 꿈들의 대부분이 지금 와서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다못해 G사 컨설팅 비스무리한 일도 있었습니다. 즉 저는 같은 게임을 2.5회차째 하고 있고, 거의 매 순간, 잘 되어 가는 것도 잘못되어 간다고 보이는 것도 기시감의 영역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겪어왔던 것들이 계속 제 눈에 있어요. 우리의 물건을 보며 그 시절의 물건을 보고, 리더의 어떤 모습으로부터 다시 그 시절 리더의 모습을 보고, 동료들의 어떤 모습으로부터 그 시절 동료를 보고, 지금 이 시점을 그 자체로서 제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과 가장 유사한 제 과거의 경험 속에서 제 의사와 상관없이 읽혀버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고른 클래스와 국가가 다를 뿐 본질적인 게임은 너무나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대충 프로토스와 저그, 내지는 스타1과 스타2의 차이같은 느낌입니다. 아무튼 제가 자주 표출하는 이해하기 어렵고 와닿지 않으며 기분나쁜 이야기들은 대부분 1회차로부터 생각하는 어떤 것입니다.

1회차보다 공략해야 하는 포인트는 더 좁아졌습니다. 그리고 같은 클래스의 병종 중 어떤 부분은 더 낫습니다. 물론, 크루들의 레퍼런스는 그 당시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그리고 크루들이 가진 코어 어빌리티 역시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저라는 사람도 과거의 실패로부터 좀 더 개인적 역량이 확대되었지요.

하지만 이 국가는 그 때보다 더 낮은 기초체력, 더 적은 먹거리 속에서 예전에 쌓아놓은 자원들을 갖고 움직입니다. 그리고 국가적 통일성은 더 약합니다. 동시에 클래스들의 성능은 더 좋은 편이지만 올드하지 않은 회사이기에 그 성능을 활용하는 것에 더욱 많은 제약조건이 붙어있죠.저그 플레이어였다가 프로토스 하는 느낌인가? 저글링은 35 체력에 2마리씩 한번에 여섯마리 나올 수 있지만 질럿은 80/80에 한번에 하나만 나오니까.

아무튼, 당시의 ‘우리’가 꿈을 꾸기 시작해 그 꿈이 사라져간 자리들이, 실제로는 더욱 빠르고 강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느낌 속에서 저는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회차는 아무래도 더 어려운 느낌입니다. 회귀자이기에 일정 부분 공략본을 알고 회귀자이기에 1회차보다 더 높은 스탯을 갖고 더 강한 스킬을 여러 개 구사하지만, 그 이상으로 회차 자체의 난이도는 더 높은 거죠.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전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돈을 원하고 감투를 원하고 다 원합니다. 근데 사실 일은 귀찮아요. 적게 일하고 많이 벌자 주의랄까요. 그리고 그 이전에 지금(정확히 말하면 여태까지 걸어오고 처해왔던 많은 것들)이 싫어요.

여기가 나쁘다(혹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싫다)는 차원의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이게 약간 이런 겁니다. 난 굳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일이야 뭐 먹고 살아야(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서는 내 수준이 계속 높아져야) 하기 때문에 하지. 즉 사실 하기 싫어. 그런데 하라고 해. 어떻게든 해야 한대. 아니면 그런 표정과 어투로 말을 해. 욕망이 있어. 하고 싶어해. 포기하지도 않을 거야. 그래서 해. 대충 하면 끝이 안 나니까(일이니까 잘 해야 되는 게 아니고) 최대한 해. 내가 보기엔 어줍잖게 하면 결국 뒷말에 뒷말로 계속 가게 되어 있어. 결국 끝은 내야 하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해 끝내버려.

즉 저는 책임윤리가 동력일 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해서 그걸 계속 재밌게 하진 않는 성격입니다. 솔루션을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에 몰렸으니까 만들어요. 어카운트를 수습은 해야 하니까 손을 대죠. 이건 공적 필요에 의한 것이고 제 호불호랑 일단은 상관이 없어요. 근데 마치 그것이 일욕심, 혹은 ‘하고 싶음’이나 야망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료나 보스들을 많이 겪어 보았어요. 사실은 제 기준에서 일이 ‘끝나’려면 뭔가를 어디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런 스탠스라는게 참 어정쩡합니다. 저라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일을 필요에 의해 판단하고 필요에 의한 방식으로 진행해요. 단지 무지성으로 쳐내면 100:0으로 문제가 되므로 고민을 해서 쳐내는 것이거든요. 그게 없으면 무관심하거나 매우 열려 있어요. 문제는 이게 일욕심과 되게 비슷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라는 사람에 대한 개인적 욕심이나 기대감, 친밀감, 애정 같은 것들이 굉장히 커지는데, 동시에 이건 불나방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게 끼게 시작하니까 어떤 순간까지는 합이 맞춰지지만, 어떤 순간에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충돌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스들이 그 시점엔 다들 그걸 잘 안/못 봐요. 당연하지만 보스들도 사람이니까. 제가 일 자체를 집어던지진 않으니까 상황은 잘 안 보이고 언행만이 남는 것이죠. 그러다가 머리가 좀 식으면..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생각한 대안들을 돌려보는데 너무 다르니까. 이제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게 이런 문제가 아니구나.

제 잘못도 크죠. 마지못해 한다기엔 너무 나갔고 끝까지 가기엔 불가능한 상황 사이에서 계속 밸런스를 잃다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기브업을 친 거니깐. 벌어졌으니까 해야 해. 안 하면 답이 없어.. 그래서 정말 어떻게든 해보고.. 진짜 다 해본 끝에 어떻게 리즈너블하게 만들어 내기야 하는데. 근데 이게 사실.. 계속 할 수는 없는 일인 거죠. 그런데 리더 입장에선 계속되어야 해요. 여기서부터 모순이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최근의 여러 클라이언트단 이슈들이 가진 난해함과 제일 유사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제 이력서는 망했고 제 발자취는 남이 보기엔 황당한.. 무슨 만취한 사람 걸음걸이 같은 것이 되었어요. 이놈은 컨설팅도 하고 개발도 하고 프리세일즈도 하긴 했는데 다 안건 자체는 듣보잡이네? 끝까지 제대로 해서 전문가스러운 건 없네? 뭐 이런 거죠.

납득했지만 납득하지 못한 결말들

하나 예를 들어보지요. H님의 ‘사업’은 H님의 중심이 있고 그 중심과 함께한 나름대로의 희망이 있었고 그 동반자도 있었기에 성립할 수 있었던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H님은 공학이라는 다른 뿌리에서 디자이너로 왔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뿌리를 정의할 수 있었고, 형수님 역시 디자이너라는 명확한 정체성이 있었고 주체적인 사람들이었기에 부부가 사업에 도전했습니다. 그건 다분히 일관성이 있고 그 결론에 대해서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납득할 수 있었냐와 결말이 좋았냐는 다른 겁니다. 하지만 이건 납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Clear해요.

그런데 저는 이런 투명함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를테면 H님의 사업과 같은 위치를 저에게 있어 차지하는 그 플랫폼은.. 제 의지라기보다는 제가 타인의 의지에 감상적으로 반응해 뭔가를 했던 흔적입니다. 그것이 실패하고 제 머릿속에 남은 잔해들을 다시 모아서 이 순간에도 월급 받아 먹고 살지만, 막상 제 삶에서 제 그것은 참혹한 실패이자 후회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뭔가를 만들어 내고 싶다는 식의 감정적인 꿈은 없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꿈은 있는데 회사원(내지는 크루로서의) 이상, 회사나 서비스나 플랫폼에 대한 비논리적인(감상적인) 꿈은 더는 꾸지 않게 되었죠.

지금 제가 얘기하는 것들은 대부분 저와 남의 꿈을 명확하게 분리하고, 단지 결정하는 자의 상황과 시선에서 결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결과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이 뭔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패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수행적인 측면의 것이 되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의 저는 더이상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에 익숙한, 생과 사의 어떤 문제들을 다뤄내야 하는, 즉 용병이 되었습니다. 단지 프로 용병으로서 의뢰자가 원하는 결론이 뭔지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죠.

그리고 이런 복잡한 맥락은 제가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저와의 사적인 관계가 아주 깊어지지 않으면 진짜로 이해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아무도 그것들이 왜 그렇게 되었을지, 그 결과로 이 사람이 뭘 알게 되었을지에 대해서 깊게 이해할 수가 없죠. 같은 상황에 놓여보지 않으면 설령 느끼더라도 매우 작은 것이고 실제 저라는 사람을 일적으로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저는 저를 설명할 수 있고 저라는 상품을 팔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어요. 그게 제 8년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점점 더 과거의 무게가 저를 누르는 가운데 여전히 저는 서 있습니다.

2.5회차의 어려움

나이는 먹었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기 직전, 즉 8년차였던 당시에는 제 ‘툴’이나 ‘스택’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것들까지도 필요해졌는데, 그것이 없어서 과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크게 문제가 되기 시작했지요. 우리가 레퍼런스라고 부르는 어떤 것들 때문에.

사실 저에겐 아무런 레퍼런스가 없어요. 여기서도 그렇죠. 전 소위 말하는 중소기업 출신입니다. 별 웃기는 상황에서 어이없는 일을 했었죠.. 전 제가 아는 솔루션을 만든 사람 같은 대단한 사람을 여기서 처음 봤습니다. 무슨 모 대기업에서 TV 회로를 만들었다질 않나, 2년차 때 벤치마킹하던 물건을 디자인했다질 않나, 모 회사 인프라 담당이셨다지 않나.. 아 진짜 내가 제일 별볼일이 없군. 그걸 원래 머리로도 알고 있긴 했는데, 이게 단순히 그런 와 대단하시다 할 문제는 아니더라고요.

얼마 전에 처음 그걸 좀 느꼈어요. 우리 회사는 대기업이나 플랫폼 기업 출신들이 많은 엘리트 집단이라네? 그리고 오며가며 보는 회사소개서도 그렇게 정의되어 있네? 막상 여기 있는 난 둘 다 아니네? 그럼 제가 여기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1회차 때 훨씬 어렸고, 1회차에 머물렀던 공간은 나에게 있어 내 미래의 레퓨테이션보다는 내 지금의 능력을 만들고 소진하는 공간이었지만.. 지금의 저는 어느 순간 제 출신으로 일정 부분 정리되는 사람인 것이죠. 봄에 저를 괴롭힌 일에 휘말린 상황에서도 그랬고 + 지금도 그러하고. 회귀를 했는데, 출신은 사실 더 낮은 상태로 회귀를 한 겁니다. 우리 영지를 부강하게 만들어서 영주님을 남작에서 후작으로 만들고 내가 기사단장이 되자! 가 1회차였다면 망한 3류 용병단 출신의 용병으로 성립되는 것이 2.5회차인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그건 제가 여기서 뭔 일을 어떻게 하고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랑 별로 상관이 없어요. 제 출신이 그런 거고 그렇게 평가되는 위치에 선 것이며 그건 제가 그렇게 살아온 결과물인 거죠. 그리고 사실 사람이 좀 자기 객관화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여기서 무슨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냈다고 일 대비 평가가 구리단 식으로 얘기를 하고 다니겠어요? 내가 봐도 내 결과물 역시 아쉬운 것 투성이인데. 다만 전 낭만주의자가 아니고 현실적인 사람이라 그런가 항상 후회가 있습니다. 내가 좀 더 과거에 쓸데없는, 남이 인정해주지 않는 걸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뭐 그런 것들 말이죠. 이건 내가 겪은 도전들에 어떻게 응전했냐는 문제라기보단 ‘어디서’ ‘어떤 입장으로’ 도전했느냐에 더 가까운 문제같습니다.

심지어 이걸 벗어나고 싶었던 첫번째 시도, 즉 저번 회사는 최악의 형태로 끝이 났어요. 그리고 이곳은 제게 있어 어떻게 말하면 제 때 내려오긴 했지만 그다지 원하지는 않았던 길이기도 하죠. 왜냐면 많은 것들이 너무 뻔했거든요. 아 씨 이거 완전 중력을 역행하는 솔루션인데.. 이거 답이 나오나? 전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대부분 강한 기시감이 있는 일이에요. 이 일의 결말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도 대충 생각하는 게 있고, 아직까지는 그것이 이번에 달라질 거란 증거를 찾지 못했고요. 더 정확히 말하면 달라질 수도 있겠단 생각을 처음에는 했는데, 지금은 바뀔 수 있냐 아니냐를 떠나서 달라지게 만들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는다는 당연한 결론으로 점점 수렴하고 있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는 거잖아요.

근본적인 동력은 과거의 실패다

그럼 왜 니가 보기엔 결론적으로 망할 게 뻔한 일을 하냐고 물어볼 사람도 있어요. 이유는 간단하지요. 옵션이 없어졌기 때문에. 제가 걸어온 길들은 제 옵션이 되지 못했어요. 떠난 지 3년이 되어도 그 때 제가 어쩌다 보니 만들었던 것들 계속 쓰고 있다느니, 2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다느니 하는 얘기를 들을 때의 답답함이란..

아무튼 적어도 그런 것들이 그 사람들에겐 의미가 있었겠지만,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좋고 매력적인 옵션을 만들어주진 못했던 거죠. 물론 더 열심히 잘 일했으면 뭔가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리고 그 경로의존성이 다시금 제가 희망하지는 않던, 제 기준에서 충분히 좋지는 않은(이건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스타트업 체질이 못되고 사업가스러운 성격이 아닙니다) 선택지가 남았지요.

그래서 저는 제가 괴로워하고, 탈출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을 다시 하고 있습니다. 주사위를 다시 한번 던지는 기분으로 말이죠. 다음 주사위도 꽝이 나올 확률이 낮지 않지만, 확률의 조금이라도 내가 뭔가를 해서 높여볼 여지가 있다면… 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진 것입니다. 망한 가챠를 회복하는 방법은… 다음 가챠에서 좋은 게 나오는 것 외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가 알게 된 거의 유일한 진실입니다.

그냥 막 재단하는 것 같지만 소신발언을 하자면.. 이건 우리 C레벨이나 시니어들의 그것과는 좀 많이 다른 부분이 있지요. 그분들 중 상당수는 (실제로 그렇게 그 분들이 생각한다는 말이 아니라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 일이 하나의 모험이고 어떻게든 결말이 나는 일에 가깝습니다. 왜냐면.. 지금의 실패를 과거의 성공으로 길항시킬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 — 정확히는 지금 시점에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실패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 자신을 타인이 완전하게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대기업, 내지는 성공한 스타트업 출신, 혹은 인정받는 전문가나 기술자, 혹은 일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리트라이 찬스가 많은 주니어라는 점이 갖는 가장 근본적인 이점이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지난 인생에서 그만큼 성공이 많았거나, 아니면 실패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에 지금의 실패가 가진 상흔이 일정 부분 해소될 수 있다는 암묵적 믿음이 있는 것이겠고요.

그런데 저는 남이 어떻게 보든, 제가 경험한 현실 속에선 그렇지 않게 된 겁니다. 전 과거에 성공하지 못했고 누적된 실패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공했던 적이 없어요 솔직히. 그리고 그걸 끊기 위한 첫 시도는 망한 후, 어쩌다 보니 또 우연찮게 전혀 모르는 사람의 제안을 받고 여러 상황적 맥락 속에서 리트라이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미 저는 그 씬이 그랬듯 레퍼런스의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결핍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아마 두번째 실패는 결코 만회할 수 없을 겁니다. 아마도 두번째 실패는 저라는 사람 자체의 그레이드를 더욱 강력하게 규정하겠지요. 왜냐면 그 히스토리가 소실되어 버릴 거니까. 물론 그렇게까지 정확히 갈리진 않겠지만.. 제 시선에선 문제들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문제들이 절실합니다. 더 먼 길을 더 빨리 가야만 해요. 그것도 제 개인이 그렇게 되면 되는 게 아니라 우리 회사와, 우리 서비스와, 우리들이 다 같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공하고, 그 성공 속에서 저라는 사람의 지분이 있었다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게 레퍼런스이고 레퓨테이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안 되는 입장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피하고 싶었던,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더 늦게, 더 나쁜 형태로 마주하게 될 것이고요.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논쟁적인 평가일 수 있습니다만 사실 전 우리 회사의 구조적 모순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연결고리가 너무 부족해요. 회사 단위에서도 조직 단위에서도 개인 단위에서도 일치하는 구석이 별로 없어요.

하고 싶은 건 대충 알겠어요. 그런데 그걸 하고자 하는 기법이 잘 먹히는 도메인이 아니지요. B2C 최첨단스러운 논리를 B2B(그것도 Anti-IT 성격의) 시장에서 구현하려는 구도인데, 우리의 현실적인 역량이나 상황이 안 받쳐 주죠. 그 부분 제끼고 그냥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접점을 찾자면 꽤 있지만, 그것이 하고 싶은 것의 영역으로 잘 가지는 않지요. 그래서 영역들이 너무 넓게 퍼지고, 그 주제들 상호간의 호환성과 관심도가 크게 차이가 나면서 해야 하는 것이 자주 미뤄지다가 하고 싶은 것과 현실이 충돌하면서 익숙한 방식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에 다시 종속됩니다. 일정 부분은 극복했지만, 근본적인 순환루프는 여전히 크고 강합니다.

이것은 마치 해운사와 조선사의 관계같아요. 대부분의 크루는 선단을 운영하는 회사의 구성원처럼 행동합니다. 그리고 투자사나 고객에게도 우리는 항구와 선단을 운영하는 회사라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싶어하고요. 그런데 고객은 항구가 아니라 배를 얘기해요. 노선은 내가 알아서 정하고 운전도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내가 원하는 배를 내놔라 이지요. 그래서 영업에선 당연히 배를 얘기합니다. 배를 만들 수는 있어요. 조선공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하고 싶은 건 선단 운영으로 피를 받는 거지 조선이 아닌 거에요. 그래서 배를 찾는 고객을 있는 배 쓰시라고 달래거나 시간을 벌어서 뭉개려고 합니다.

저는 사실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요. 회사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수 있고 그 방식이 중요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선택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선택하면 되고, 수행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 선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고 그럴 수 없다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요. 우리가 우리를 뭐라고 규정하느냐는 규정하기 나름이에요. 다만, 제가 생각하는 것은 그 선택을 어떻게 고객에게 이해시키고 그것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게 할 거냐입니다. 포지셔닝이라는 건 하는 것도 있지만 되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고객은 배를 내놓으래. 있는 고객도 우리가 자기가 원하는 배를 만들어 주니까 우리랑 거래를 한대. 그러면 우리는 결정을 해야 해요. 조선에 집중할 건지, 물류에 집중할 건지. 배를 원하면 고객들이 원하는 배를 정확히 설계하고 건조할 능력을 갖든지, 아니면 그런 게 가능한 배를 정말 싸게 찍어내서 고객이 좀 아쉬운 데가 있어도 용도에 맞게 쓸 수 있게 하든지 해야 할 것이지요. 반대로 물류를 원하면 좋은 입지를 찾고 거기에 범용적인 시설을 두고 물류를 장악해야 할 거에요.

배를 만들고 싶으면 배에 대해 얘기하면 되고, 해운을 하고 싶으면 해운에 대해 얘기하면 되겠죠. 물론 저는 1회차 때 우리 항구와 배가 있는 상태에서의 해운업을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배에 대한 제안서를 주로 썼습니다. 배를 만드는 것이 해운의 시작이라는 식의 기괴한 생각을 하면서. 불일치하지만, 그 모순을 꿈이 지탱했습니다. 딸린 식구들의 입을 충족시키면서도 꿈을 향해 전진해야 하는 모순을 받아들였으니까.

지금은 어떨까요?. 우리는 선단을 구축하기 위해 배를 만드나요? 아니면 배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갖고 싶은가요? 우리의 항구는 무엇인가요? 모순이 있으면 그걸 지탱하는 꿈이 있나요? 중요한 것은 이 질문들에 대한 YES/NO가 아닙니다. 그 YES/NO에 대해서 우리와 고객이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 어떻게/얼마나 존재하느냐 하는 지점같습니다. 우리가 매번 갈등하고 있는 부분이 이거겠죠.

제가 바라보는 시선은 대략 이렇습니다. 해운사가 되고 싶은데 아무도 해운사로 인정하지 않으니 일단 배를 만듭니다. 그런데 재밌는 요구가 나오면 창작자의 혼과 해운에 대한 욕망이 결합해서 열심히 배를 만들고, 재미없는 요구가 나오면 여기에 대해서 결론을 내는 것 자체를 일단 좀 미뤄두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어떤 고객을 상대로는 자발적으로 일을 벌이고, 어떤 고객을 상대로는 일단 받아놓고 나중에 그걸 좌절시키거나 최대한 미루려고 하는 결과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제 생각엔 우리는 데이터라는 화물을 다룰 수 있는 배를 계속 일정하게 수주받아 만들고 납품하면서, 결과적으로 시장에서 먹힐 수 있고 가격 경쟁력이 있는, 그런 배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게 시작 같습니다. 이건 아마 한 개의 배가 아니라 여러 배일 거고 심지어 배가 아닐 수도 있죠. 그런데 그것들을 모으면 해운이든 항공이든 육상운송이든 어떤 건 확실히 됩니다. 그렇게 하나씩 공략해 가는 거죠.

그 과정에서 고객의 화물을 싣고 전세계로 선단을 돌리고, 이러다 보면 이제 또 누가 야 우리 배 좀 만들어줘 하면 돈 많이 주면 확실히 해준다 하고 돈 많이 받고 만들고. 하다 보니까 보니까 항공기도 사오고, 트럭이랑 기사님 구해서 육상물류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전세계에 네트워크를 만들게 되는.. 즉 우리 고객들의 데이터라는 물류를 운용하는 것에 전문인 회사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합니다.

방향은 보기 나름이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방향 그 자체에 대해서 옳다/그르다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뭐가 어쨌든, 우리는 자주 시작부터 항구와 배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어떤 건 고객에게 완제품을 만들어 보내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어떤 건 고객에게 납기 자체를 지키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부분은 과도하게 중심부로 들어오고, 적절하게 중심부에 얼라인되어야 하는 일이나 사람은 쉽게 주변부로 밀려나가죠. 네트워크는 기대할 수 없고 어느 고객도 100%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또 원점으로 돌아가요. 밸런스와 순환루프가 잘 성립하지 않는 구도입니다.

사실 우리의 전반적 문화는 전형적으로 제품 잘 만들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그걸 위한 자유로운 아이데이션과 다소 열려있는 방향성을 지향하는 흔한 스타트업 문화지요. 사람들도 대부분 그런 스타일이고. 그만큼 개인들의 창발을 (공식적으로는) 믿죠. 반대로 전 2류 용병단(첫번째 회사)과 2류 군대(두번쨰 회사), 3류 방산기업(세번째 회사)을 겪어본 2류 용병입니다. 이긴 경험은 많지 않지만 살아남기는 해서, 죽고 사는 싸움을 하는 것은 익숙한 한 명의 용병이에요.

용병은 전쟁에 투입되면 이기든가, 아니면 지더라도 살아남든가, 아니면 전장을 잘 골라서 애초에 질(죽을) 싸움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걸 위해 전략과 전술을 공부하고 무장을 좋은 걸 쓰고 적의 동태를 감지하고 뭐 그러죠. 그런 시선에서의 우리는 전투에 자신이 없는데 전투를 비즈니스로 하는 곳 같아요. 2.5회차의 저는 거기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 사람인 거죠.

우리의 메인이 되는 실존적인 일은 고객이 답을 규정하다시피 하는 그냥 SI/SM입니다. 이건 완전히 전쟁이에요. 아군과 적의 배치를 보고, 적절한 무장과 전술을 골라 싸워서 살아남고 이겨야 하는 일이죠. 여기서 생각해 보면, 우린 이를테면 군대에 뭔가를 납품하는 군납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용병이라는 군사력을 파는 비즈니스를 하는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실제로 그렇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저는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만 일을 했던 사람이고 그 관점에서 그런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제 기준에선 우린 많은 고민들로 쌓인 역량이 표현되는 여러 방식 중 하나로서 제품이 존재해야 하는 회사입니다. 우리가 너희 전쟁에 투입되서 싸우다 보니까 이런 무기(내지는 드론)을 만들었어. 그런데 너네도 이거 쓰면 좋을 것 같아. 이거 쩐다? 이거 있으면 너네 보초도 필요없고 소총수 숫자 반으로 줄여도 된다니까? 우리가 해봤는데 그래! 라는 어떤 것 말입니다. 물론 이건 우리가 현 시점에 ‘해야 하는’ 많은 일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황이 다르면 다르게 판단하겠죠.

고객은 전쟁을 하고 있는데 사람 값이 아까워서 용병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전투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제공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 문제를 마음 속에서 밀어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전투력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전투력을 제공한 것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결국 일단 시간을 벌고, 마치 어린왕자의 상자와 같이 뭔가를 일단 만들고 거기에 뭔가를 넣어서 회사의 역량을 확충하려고 한단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나름 대로 많은 좋은 미덕이 있지만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실패를 통해 배우려고 하는 것도 있다고 느껴지고, 워킹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임계점을 넘기지 못한 상황을 너무 오래 방치하면서 시도에 의의를 두는 듯한 부분도 있고, 잘못하면 치명상을 입는 문제를 모험적으로 하는이 있다는 생각을 하죠. 진퉁 SI에 가까운 방식으로 일이 만들어지는데 일을 다루는 방식은 굉장히 초기 스타트업틱해요. 이런 부분들이 모순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전 여기서 급격하게 고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왜냐면.. 사실 우리 중 대부분이 지금 당장 하는 일들의 스킴과 논리구조에 익숙하지 않단 말이에요. 군사 비즈니스에서 어떤 기회를 본 사람들인데 실제로 전투에 익숙한 전투기계들은 아닙니다. 만사가 전투인데 사실은 화약 냄새와 핏물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대신 프레시함과, 좀 더 IT 테크놀로지적인 부분에서의 전문성을 가져서 전쟁(과 같은 어떤 부분)을 재정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구성원이겠지요.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레거시함’으로 가득한 우리 고객들의 업 그 자체를 깊게 다뤄내는 능력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다만, 되돌아보면 이것을 고친다는 표현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 레거시하고 올드한 감성의 것들이며 수십년간 사람들이 해오던 것들의 집합체이자 열화된 유산에 불과한 것들이니까. 막말로 저라고 뭐 우리 도메인 잘 아나? 개뿔도 모르죠. 단지 우리 도메인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업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드는 것이 거기에 관련된 IT적/데이터적 메소드들을 위한 요소들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필 그게 ‘경영의사결정지원’이다 보니 제가 가지는 익숙함이라는 게 있을 뿐이겠지요.

즉 우리 회사의 다수는 우리가 놓인 환경에서 각자가 가진 장점이 크게 반감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에 비해 저같은 사람들은 애초부터 전투를 업으로 삼았던 적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황이 더 적절한 것이지요. 이 지점은 어떤 부분에선 구성원들의 사고방식이 그만큼 서로 다르고, 그 지점으로부터 나오는 긴장과 대립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회사에서 사람들이 가진 이해관계의 차이보다 더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적인 관계의 마지막은 결국 성공과 실패

우리는 사적으로 친구나 친한 선후배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사근사근함, 술자리, 담탐, 식사 같이 하기.. 많은 사적인 것들이 있죠. 그것들 나름대로의 가치도 있고. 제가 좋게 딴 곳으로 뭐 영전 비슷하게 했다든지 하면 형동생 이런게 되는 거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이전에 동료, 혹은 리더와 팔로워라는 공적 관계지요. 우리를 잇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위치나 감정적 친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미션과 업이에요. 그것이 공적인 것이죠.

오히려 우리가 그런 관계가 되는 건, 우리의 관계가 더이상 공적인 것이 아닐 때의 어떤 미래일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우리를 아픔이 아니라 추억으로 기억하기 위해선..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방향을 잡고,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걸 넘어서기 위한 뚜렷한 노력을 해가면서 볼드하게, 현명하게 전진해야만 하겠지요.

영원한 건 없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들의 마지막 모습으로 많은 걸 규정하게 되겠지요. 공적인 미션에서 성공을 같이 누리지 못한 자들의 관계는 링크드인 1촌과 카톡 친구 이상으로 가지 못합니다.

실제 시간 속엔 많은 희노애락이 있지만.. 결국 남는 건 결과일 거에요. 우리의 관계는 결국 최후엔 우리들이 이루어낸 성공적인 것들이 뭐고 그것이 얼마나 컸냐에 종속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이 최후에 최소한 나쁘지는 않았던 기억으로 모두에게 남기를 원합니다.

공적인 것에 집중하기

공적인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회사가, 조직이, 우리 식구가 해내야만 하는 것들 그 자체를 하는 최전선에 서기를 피하지 않는 것이고 이건 크게 세 가지를 중시 여긴다는 것 : 회사의 방향이 첫번째고, 거기에 대한 조직의 책무가 두번째고, 조직적 책무에 대한 나의 책임이 세번째고. 그것들을 중시 여긴다는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결국 회사에서 누군가가 해야 하는 것은 전부 이것의 어떤 가지들일 뿐이지요.

그래서 특별히 이것 자체가 유별난 것이 아니고 단지 얼마만큼 이것들을 First로 생각하느냐의 문제이겠습니다. 여기엔 ‘입장’이나 ‘기분’은 빠져 있습니다. 그건 공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공은 결과로 정의됩니다. 그래야 한다는 제 신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전 그런 신념이 없습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입니다. 시간의 문제일 뿐 그렇게 됩니다.

전 내가 회사에 있음을 의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순간에 이것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나의 귀찮음, 타인의 괴로움 등등..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결국 저것만이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저것을 위해 모두가 이 회사에 존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고민을 하는 것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만큼 확정적으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으니까요.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걸 안 하면 안 하는 만큼 우리 모두의 미래는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할 걸 했다면.. 미래를 밝게 만들 여러 기회를 얻겠죠. 그걸 살릴 수 있을지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고 운의 영역도 많겠지만, 운과 실력 중 우리가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건 실력밖에 없기 때문에 어차피 결론은 같습니다.

살아남았다면 우린 어떤 모습일까

전 우리 C레벨이 우리가 몸담은 산업을 혁신하는 선도에 있는 명사들로 평가받길 원합니다.
전 우리 회사가 우리 도메인의 경영의사결정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갖고, 이것들을 다뤄내기 위한 최고의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정상급 전문가 집단으로 불리길 원합니다.
전 우리 솔루션이 돈 문제만 아니라면 전부 관심있어 하는, 성공한 중견 고객들의 중추 IT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길 원합니다.
전 우리 회사에선 뭔가를 제공하던데? 라는 것이 이 업계에 난립한 중소 솔루션 업체들에게 경각심과 벤치마킹, 콜라보 생각이 들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우리 BI 하는 친구들이 화면찍는 주니어 말고 한 개의 업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을 가진 데이터 인력으로 자리잡고 커피챗 요청으로 링크드인이 미어터지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전 우리 제품 관리자나 디자이너가 이 업의 제품과 IT라면 알아주는 사람들이라서 대형 브랜드들의 스카웃 제안을 받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전 우리 엔지니어들이 이 업에 관련되어서는 정말 비대칭적 기술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엘리트 집단으로 비춰지길 원합니다.
제가 이런 걸 원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을 존경하거나 예뻐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반대로 우리가 길게 살아남고 몇 년 뒤에도 이 회사에서 같이 있다면 결국 우리가 여기에 도달했거나 근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하려면… 1차적으로는 시간과 사람과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들이 많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기초체력 — 인원수, 인프라 수준, 기획인원, 기술인원 등등..이 부족하다는 점이 너무 크거든요. 그런데 요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순환논리가 되어버립니다.

자원이 없어서 자원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걸 못한대. 그런데 자원을 늘리려면 돈을 벌든 빌려오든 투자받든 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할려면 자원이 있든 없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없는 건 없는 거고 그런 원론적인 걸 문제삼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죠.

그래서 작게라도, 제한적으로라도, 부침이 많더라도 양의 순환루프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 방법과 시선이 있고 제 관점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업은 제품으로 규정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의 업을 우리의 내부 툴, 또는 우리가 고객에게 제공한 툴을 통해 더 쉽게+더 높은 수준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어떤 그림이 있을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양손을 생각해 보면.. 한 손에는 고객과 고객의 업을 IT적으로 규정하고 지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의 심도있는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손에는 그 이해의 결과물들을 제품이나 코드나 디자인이나 DB같은 형태로 세련되게 다뤄낼 수 있는 전문성이 있어야겠지요.

이건 도메인출신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코딩실력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목적에 충실한 이해도와 전문성이라고 보는 게 오히려 맞겠습니다. 그 두 개가 조화되어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량의 초격차를 점점 만들어가는 것이고, 제 생각엔 우린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초격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외의 많은 것들이 있겠죠. 그 중 반복적이면서 구조적인 것이 제품이 되고 좀 더 비정형적이면서 크고 전략적인 것들은 프로젝트가 될 거에요.

이걸 시작으로 하기 전에도 생각하고.. 하면서도 생각하고.. 하고 나서도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효율성과 효과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이걸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방식으로 녹여내고… 그걸 기반으로 다시 또 뭔가를 벌이고.. 그걸 또 하면서 새로운 문제들에 응전해 내고.. 이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비용을 줄이거나 매출을 늘리려고 하는 것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씬의 전문가가 되어가면서 점점 더 알잘딱깔센을 많이 시전하는 모습이 되면 좋겠지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걸어온 길들이 모여서 구조적인 비즈니스를 창출하는 활로가 되어 있을 테니까.

그 시점에 우리가 가진 많은 역량들은 솔루션화되어 돈을 버는 구조를 지탱하는 정교한 머신들로 바뀌어 있을 것이고, 우리는 이 머신들 N개와 우리만의 노하우를 기반으로 머신만으로는 공략할 수 없는 또 어떤 일들을 해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23년에 ‘성공했다’ 내지는 ‘중요한 성과였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미 그런 방향으로 조금씩은 가고 있습니다.

지금에 맞게, 핵심을 관통하자

아무튼 이런 걸 더 크게 + 더 잘 해내려면.. 일단 우리가 정말로 고객에게, 이 시장에 대해서 제공하고자 하는 우리만의 가치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하고 거기에 항상 민감하게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건에 끌려다니는 것보다 안건들을 관통하는 핵심에 대한 깊이와 집중력을 가져가야 한다, 이거 하나는 우리가 확실하게 한다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지요.

민감한 얘기지만 제 생각에 우리는 과거 상황을 기반으로 우리를 설명하지 않으면서 생각은 그것이 모든 것이었던 시절처럼, 정확히 말하면 2021~2022년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골자에서 충분히 확장하지 못한 상태같은 거지요. 익숙해서 그런 것도 있고, 몰이해가 있어서 그런 부분도 있고 그렇지만..

막상 우리가 문서 상에서, 또는 바깥에 우리 회사를 소개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고 리 포지셔닝에 그렇게 공을 들인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소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사람들이 안하고 있단 말은 아니에요. 다만 상황 대비 충분하지 않고, 한 두 사람의 고민이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전사적 주제 같다는 것이지요. 만약 이게 충분해 왔다면 우린 23년을 다른 방식으로 다같이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혁신에 필요한 문제들을 좀 더 잘 다루려면 보다 고객의 일에, 크루 서로의 일에 관심과 신경을 두어야만 합니다. 말하는 걸 해준다 이런 거 말고, 그걸 각자가 가진 전문성의 관점에서 다시 관찰하고, 재해석하고,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서로 던져주어야 하지요. 내 일을 덜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타인의 일을 덜어낼 수 있는데 타인은 모르지만 내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일을 계속 발굴해 내고 그걸 실행으로 옮겨서 전사적인 자산으로 만들어내어야만 하니까.

일례로 세일즈에 커스터마이즈를 보다 어렵게 다루라는 얘기를 하려면 그만큼 상품력이 받쳐줘야 하고, 상품력이 받쳐주려면 고객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고민에 몰두해야만 합니다. 그 과정을 기획적/기술적으로 잘 정리해서 일정한 결과물과 청사진을 고객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물로 외부적으로는 잠재고객의 생각을 선제적으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하고, 이로 인해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운신폭을 만들어내고, 운신폭을 기반으로 고객과의 파워 밸런스를 세일즈에서 자연스럽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지요.

저는 구조 지향적인 사람이고 개인의 역량이 아닌 일정한 구조를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죽고 사는 문제에 익숙하지만, 활로를 찾는 문제에서 제 주 관심사는 이 싸움 말고 매번의 싸움에서 승률을 높이려면 뭘 해야 하는가입니다. 단지 순간적인 문제들 속에서 제 전술적인 판단과 결정들이 조금씩 있을 뿐이죠.

하여튼 그래서 제 생각엔 관심과 신경을 서로 두어야 하는데, 그것을 그냥 단순히 말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뒷사정이나 날것의 VOC, 복잡한 도메인 날리지, 구현상의 테크니컬 이슈 같은 수많은 ‘내가 개선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조차도 서로 탐욕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도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주제를 다루긴 커녕 소통하는 것조차도 누구에게도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건 비단 고객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파트와 모든 개인에게 다 동일한 문제입니다. 제가 가끔 매우 엄격하게 ‘이 부분은 내가 정리한다’, ‘당신에게 이것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내지는 ‘나는 당신의 판단을 믿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얘기하는 지점이 이 부분입니다. 하면 그만인 게 아니라 정해야 하는 문제는 문제에 대한 이해도와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정의할 능력과 실제 결과물을 적시에 적절하게 만들어낼 수행 능력을 모두 요구하는데, 그것들 중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모두 문제가 됩니다.

반대로 커스터마이즈 개발단의 부담을 최소화, 즉 혁신에 필요한 문제들을 보다 ‘쉽게’ 다루려면 이 역순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 돌아가야지요. 일의 견적(금액 말고)을 잘 내고, 최대한 재활용 찬스를 만들어내고, 굳이 들어가면 커뮤니케이션 코스트를 최소화하는 것을 통해 일반 업무나 미래를 위한 투자 대비 재활용이 어려운 부분에 리소스를 투입하는 부담과 기회비용을 줄여주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결국 기회를 얼마나 자주 효율적으로 만들어내서 기회비용을 앞에서 얼마나 잘 줄여주는가가 대고객 커스텀 대응 폭을 늘려잡거나 커스텀 대응이었던 문제들을 제품 업그레이드로 보다 빠르고 쉽게 끌고 들어올수 있는 가장 큰 신뢰자산입니다. 당장의 문제를 위해 초가지붕을 땔감으로 쓰는 상황을 최대한 덜 만들고, 그런 상황을 만들면 즉시 초가든 나무든 더 가져올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래서 BD/맨투맨만큼 테크니컬 세일즈/프리 세일즈나 프로젝트 매니징의 개념이 많이 들어와야 하겠지요. 그걸 위한 ‘만드는 것 이외’ 영역에서 프로덕트/테크 실무자들의 다양한 서포트와 오너쉽 발현이 필수적일 것이지만, 반대로 그것을 그 사람들에게만 의존하려는 체계도 좋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우리 나름대로의 프레임워크가 있어야 합니다.

두 쪽은 분리되어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일을 어느 쪽에서 바라보냐의 문제입니다.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고, 본질을 다루는 기법 — 즉 전투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는 맥락이겠죠. 최근 논쟁들이 있었던 요구사항정의니 M/M 계산이니 하는 부분들은 그걸 위한 여러 각론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겠고요.

그래서 저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다같이 더 노력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태도적으로든 실무적으로든 말이지요. 이미 그거를 위한 많은 밑준비들이 진행은 되고 있지만.. 미시적인 어떤 것보다는 거시적인 큰 물줄기들이 충분히 그러한지는 약간 물음표입니다. 이런 것들은 기간을 두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체질적이고 문화적인 개념들입니다.

그래서 개인적 차원으로 좀 보자면

오래 걸리는 일이지요. 이상론적인 것이고. 하지만.. 사실 우리에겐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회사라는 건 3년 주기로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1년은 준비하고, 1년은 도움닫기 하고, 1년은 거기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되니까. 그 결과로 사업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각자 갈 길을 다시 선택하게 되고요. 우린 굳이 얘기하면 23년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제 기준에선 도약하려다 꼬인, 혼미와 실패가 많았던 시기였지만… 이것이 과연 이렇게 규정되는 것이 맞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다만 그렇다면 24년은 어떨까요? 그럼 25년에는? 제가 이 길고 긴 얘기를 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24년을 바라보는 방식이 23년에 대한 판단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 회사를 옮기게 될 때 내년 이맘때를 생각했고 그 다음 이맘때를 생각했고 그 다음 이맘때를 생각했던 경우가 많았어요. 요새는 내년 정도까지만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런 생각들을 하는 이유는 회사보다는 대부분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이 회사를 이렇게 다님으로서 나는 미래의 어떤 시점에 나 자신을 뭐라고 정의하게 될 것인가, 사람들은 나를 뭐라고 이해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죠. 용처가 있어야 밥을 먹고 살 것 아니겠어요?

그 생각의 끝에 제가 납득할 만한 해답은 나온 적이 없습니다. 전 처음부터 시작을 좀 잘못했거든요. 다만 여기서 보낸 1년으로 제가 얻은 게 아예 없진 않아요. 포지션이 뭔지 모르겠다 상태에서 대충 ‘Data Manager’ 내지는 ‘Data Product Manager’ 내지는 ‘Data Ops Manager’ 같은 형태로 정의는 할 수 있게 되긴 했지요. 좀 더 욕심내면 ‘도메인 A Data Specialist’ 쯤 될라나? 뭐 별 거 없긴 한데 ‘비기술자’ 에서 입장 자체는 나름 주어가 붙은 전환이 되긴 된 거고. 관련해서 여러 크루들이 얘기해 준 부분들이 있지만 그건 맞지 않다고 봐요. 제가 고민하는 것들은 엔지니어링으로 자주 표현될 뿐 엔지니어링보다 훨씬 개념적인 부분에 더 가깝기 때문에. 제 엔지니어링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하는 매우 국소적이고 조잡한 종류입니다.

제가 지금 이 시점에 생각하게 되는 대원칙은 결국 또다시, 어떻게 보여지건간에 그러려고 노력했듯이 조직과 동료와 이해관계자의 공적 성공에 충성하는 것, 그것을 위해 타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관점으로 매사를 견고하게 다뤄내는 것, 사적으로는 친근하진 않을 수 있어도 공적으로는 서로 은혜를 입히고 보은할 수 있는 신뢰를 갖게 하는 것, 그래서 어려운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만들어내 믿음과 안정감을 주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제가 하는 일들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것밖엔 없을 테니까요. 이건 선의보다는 현실의 문제가 되어버렸지요. 제 생각엔 우리 회사가, 저의 리더가, 우리 동료들이 명시적으로/묵시적으로 저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이런 것이기 때문일 것이고, 또다른 관점으로는 모든 것을 조금씩만 알고 조금씩만 할 줄 아는 다재무능의 한계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대로 있겠다..는 차원의 그런 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고민을 짜증이나 날카로움 그 자체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 더 세밀하고 따뜻하게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몇 번 제가 이것들을 드러낸 적이 있는데 망상으로 치부되지는 않았거든요.

오히려 어떤 부분들은 그런 생각과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다가 알게 된 경우들도 좀 있었고, 제가 약간 참참못 해서 얘기를 구구절절이 직접 쓰거나 한 경우에는 그것들이 남기는 파문들이 제법 있긴 있었습니다. 물론 이게 모든 케이스에 다 가능한지는 모르겠고 사실 몇 개는 그냥 불가능한 것 같은데, 또 몇 개는 가능하고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그리고 좀 더 미시적으로는.. 우선 BI쪽에는 좀 더 대고객 안건 자체에 대한 자율성을 갖고 도전적인 일을 하게 서포트해주고 싶습니다. 솔직히 재미없잖아요. 결국 자율성이 허용될만한 상황적 룸이 있어야 BI에서 보다 성취감 있는 일을 해가면서 더 높은 수준의 인력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해 갈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앞단 커뮤니케이션(기술협상)을 적시에 잘 풀어야 하는데, 이건 저랑 H님의 책무에 가까운 것 같고요.

지금은 앞단 커뮤니케이션이 너무 자주 꼬이면서 무지막지한 일정 압박이 생겨나기 때문에 분업으로 일 진척 속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을 정말 재미없게 만드는 일에 제가 너무 몰두하고 있는데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에 관련된 문제가 사실 우리 회사에서 굉장히 취약한 PM/AM(프로젝트 매니징/대고객 관리) + PS(프리세일즈)+TS(기술영업)에 관련된 부분과 강하게 엮여 있는 부분같고요. 어려운 문제인데.. 신경을 저랑 H님이 많이 써야 하지요. 뭘 하자 라는 것보다 그런 것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하면 될지를 트라이를 통해 계속 만들어 봐야겠고.

제 업무 상에서 가장 심각한 아킬레스건인 데이터의 전반적인 설계와 운용 파이프라인(으로 주로 표현되는 구조적 엔지니어링) 문제에 대해서는.. 솔직히 지금도 머리가 정말 복잡하고 이 부분은 좀 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긴 합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 중 하나는 수집부터 시각화까지 모든 데이터가 어디서 흘러들어와 어떤 구조로 파킹되고 이것이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운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전체적인 데이터 운용 전략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당장의 필요와도 너무나 많은 부분이 충돌해서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습니다. 이게 제 개인적 능력으로 완결지을 수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제가 문제만 얘기했지 제 잠정적인 이상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집요하게 만들어보려고 하진 않았던 것이 있죠. 이거 되어야 이걸 실현시키는 기술적/설계적 피팅이 가능한 건데. 매우 복잡한데 제가 삽을 뜨지 않으면 안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플리케이션 사이드 문제는 어느 정도 제 나름대로의 관점이 있고 이 부분을 잘 실현시키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그 어플리케이션에 대해 흥미가 있는 건 어플리케이션 자체의 기능적인 부분보다는 어플리케이션이 우리 솔루션의 전체 데이터 운용 전략과 프로세스 사이에서 다른 모듈과 어떤 관계를 맺고 + 그것이 고객에게 타 유사 솔루션과 달리 배타적인 기능과 가치로 어떻게 발휘되게 할 것이냐에요. 어플리케이션이 아니라 어플리케이션을 둘러싼 관계들에 대한 것이지요.

이 부분은 J님과 많이 겹치지만 동시에 또 결이 다릅니다. 저는 그 툴그 자체에 대해서 논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다양한 데이터들이 모여야 가능한 배타적인 기능을 제공하면서 범용적인 기능을 같이 제공할 수 있는 데이터 플랫폼입니다. 이것에 가까운 컨셉트를 만들기 위한 많은 전제조건과 밑작업을 달성하는 부분인 거니까. 데이터가 흘러서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CRM은 이미 CRM이 아니라 플랫폼입니다.플랫폼에 CRM의 성격이 있는 거지 CRM 그 자체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카카오톡과 엑셀, 작게 잡으면 세일즈포스와 슬랙, 더 작게 잡으면 하이웍스와 모두사인과 채널톡을 이기기 위한 여정을 해야겠지요.

이렇게 보면 많은 부분들이 엔지니어링 지향적, 혹은 내부 지향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상품 지향적입니다. 전 세일즈나 비즈니스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저는 회사에서 전술 스페셜리스트 역할을 자주 하지만, 그건 당장 이걸 어떻게 해야 하니까 하는 판단이고 거시적 판단은 다른 궤도입니다. 제 문제의식은 기본적으로 그런 것들에 대한 전술적인 문제보다는 환경 그 자체에 주로 깔려 있습니다.

세일즈나 비즈니스 환경에선 옵션이 부족하고 결국 새롭고 더 강력한 전략적 도구가 요구되는 상황인데 그걸 어떻게 해나갈 거냐..인 것입니다. 전투적 관점에선 권총과 샷건은 있는데 이게 구조적으로 너무 연사력이 떨어져서.. 고도화시켜서 기관총을 써야 이게 좀 싸움이 될 것 같다 입니다. 바주카포도 좀 잘 써야겠고.

여기서의 대전제는 ‘수집하는 데이터의 종류를 늘린다’는 옵션을 최소화하고, 전체적인 운용구조/기법/기술들을 최대한 더 끌어올려 보자는 것입니다. 제 생각엔 회사가 제공할 수 있는 배타적 경쟁력은 모든 범위에서 조화롭게 발생해야지 특정 섹터에 집중되면 안 됩니다. 지금 그 섹터의 대부분이 우리에겐 우리가 쓰는 솔루션 환경이 제공하는 유연한 커스터마이즈와 인력의 높은 가용성(즉 인력들의 미친듯한 오버로드)에 있는데, 이렇게 되면 계속 우린 솔루션과 데이터 확보 문제 때문에 고객이 늘어나는 것 자체가 문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여기에 관련된 이해관계는 전사적이지 않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만 제한된 범위에서 미친듯이 고생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HR에서도 갈수록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요새 확보한 어떤 데이터를 정규 사양으로 서빙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같은 맥락에 있죠. 그래서 이런 배타적 수집 데이터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경쟁력을 확충하는 부분은 가급적 최소화하고, 해야 하면 정말 무슨 고기구이 고기찜 고기수육 다 해먹고 남은 뼈로 사골국 끓인 다음 라면까지 끓여 먹고 남은 국물에 찬밥 말아 싹싹 먹는 수준으로 가는 게 좋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튼, 전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이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다 수준높은 형태의 가공과 연동, 또는 어떤 부분에선 AI를 통해 고객에게 보다 더 와닿게 제공하고, 어플리케이션과 보고서의 역할을 좀 더 기능적 뎁스에 의해 분할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어야 배타적 경쟁력을 보다 다양하게 많이 제공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이터 전략에 대한 얘기의 각론 중 하나로 보일 수도 있는데, 맞죠. 정확히 말하면 데이터 전략 중 데이터 상품화 전략에 대한 부분이겠고. 우리 서비스의 본질은 데이터에 있으니까. 이게 얼마만큼 해결되느냐가 사실은 비즈니스적 운신폭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많은 고민들은 하는 사람이 내부에 있을 뿐 내부에서 외부에서의 근본적인 환경을 우리 쪽에 좀 더 유리하게 다뤄나가는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얘기가 정말 길었습니다.

23년 모든 팀원분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 혼란이 있었고 아직도 많은 것들은 정리되지 않았으며 정리할 방향도 명확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많은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해 내야 한다는 뷰는 점점 더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어가고 있는 지점은 좀 위안이 되긴 합니다. 결국 모든 진전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회사의 미션, 조직의 책임 속에서 빛나는 ‘우리’의 성취와 개인적 성장을 모두 이루실 수 있는 내년이 되시기를, 그 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거움을 얻는 내년이 되었으면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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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에서 데이터 블루칼라 역할을 하는 유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