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스타트업 유감

Ghost_0503
11 min readSep 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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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건 스타트업 씬에 있고 이직 한두번 해본 시니어들은 이미 모두 공감할 것이다. 이제 스타트업들의 돈줄은 마르고 있다. 이미 많은 유명한 스타트업이 무자비한 밸류에이션 칼질을 당했다.

적자를 감내하고 매출을 늘린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문법이 되었고, ‘영업이익’이라는 스타트업 씬에서 거의 10년간 낯설었던 단어가 드디어 중심으로 와버렸다. 경영진과 종사자들은 스타트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기업이고 기업은 ‘장사’를 하는 곳임을 몸으로 깨달아 간다.

사실 이직할 때만 해도 러우전쟁이 터질 거라는 건 몰랐고 미국이 무자비한 자이언트 스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좀 있으면 스타트업 이직한 지 1년 되는데 상황이 이러니까 웃플 뿐이다. 역시 인생사 뜻대로 풀릴 리가 없다.

아무튼 최근에 써보고 싶었던 주제가 있어서 미디엄을 오랜만에 다시 잡았다. AI 스타트업이 가진 난제에 대한 것이다.

AI 스타트업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AI 스타트업인가? AI 스타트업은 테크 스타트업의 한 갈래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테크 스타트업이 뭐냐는 주제부터 생각을 해보자. 테크 스타트업이라는 말은 항상 애매하다. 많은 스타트업들은 자신들의 기술력과 기술팀, 기술문화를 PR에 사용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을 테크 스타트업으로 브랜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타트업에서 중심은 당연히 (B2C 지향) 프로덕트다. 프로덕트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여러 의미가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핵심은 1) 어쨌건 고객과 시장을 먼저 보고 2) 결핍된 니즈를 찾고 3) 그 니즈를 해결해 주는 어떤 솔루션을 4) 서비스로 제공한다는 일관된 사이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흐름을 지탱하는 건 일종의 구심력이다. 프로덕트는 고객을 바라보고 있지만, 고객들의 공통된 니즈들을 빨아들이고 있고 고객 하나하나에게 맞춰 각각의 프로덕트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이건 그 프로덕트가 플랫폼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좀 거리가 있다. 플랫폼은 ‘연결’이라는 대안을 제공하는 프로덕트다. 딱히 플랫폼이 프로덕트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어쨌든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프로덕트란 결국 좋은 대안으로 강한 구심력을 발휘하는 프로덕트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런 프로덕트를 만드는 것을 중시 여긴다. 이 과정에서 테크는 프로덕트를 받치는 자산인 거지 회사 그 자체의 상징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테크 스타트업이란 이런 문법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는, ‘기술’ 그 자체가 핵심에 가까운 스타트업을 말한다. 핵심은 포지셔닝에 있다. 시장을 얘기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상식적으로 그런 회사가 어디에 있는가), 시장에 프로덕트로 임팩트를 주는 게 아니라 기술로 임팩트를 주겠다는 식의 접근을 주로 하는 스타트업이 곧 내가 생각하는 테크 스타트업인 것이다. AI 스타트업은 이런 테크 스타트업에서 테크 중 AI 기술에 특화된 것이고.

실제 기술력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는 문제는 별개다. 그리고 그 기술이 대체 뭐냐(ex : 컴퓨터 비전, NLP.. 뭐 여러가지 있을 것이다)도 별개다. 당연히 AI 관련 하드웨어 스타트업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쯤 되면 국내에 이런 기준을 만족하는 기업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짐작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다.

AI 스타트업의 4대(?) 난제

AI 스타트업에는 공통적으로 몇 가지의 난제(어느 회사나 있을 수 있지만 AI 스타트업에서 더더욱 심해지는 난제)가 존재한다고 본다. 대충 리스트업 해보면 이런 것들이 나온다.

  1. 선후관계의 역전
  2. ‘갑’이 되지 못하는 구조
  3.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운 조직문화
  4. 일상이 된 퀄리티 부족

선후관계의 역전

AI 스타트업의 일반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한 키는 회사의 정체성이 프로덕트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AI 스타트업의 정체성은 프로덕트가 아닌, 미래에 프로덕트가 될지도 모르는 어떤 기술에 위치한다. 물론 거의 모든 AI 스타트업은 ‘우리는 프로덕트가 없어요’ 라고 대놓고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겐 프로덕트가 없다고 하는 내부적인(동시에 비공식적인) 고백이 있을 뿐이다.

이건 대부분의 스타트업 종사자들에게도 낯선 논리다. 대부분의 스타트업 종사자들이 시달리는 선후관계 역전의 문제는 이를테면 ‘우리도 NFT 해볼까’ 라는 식으로 떨궈지는 뭔가 같은 것이지, ‘우리가 이런 쩌는 기술이 있는데 이걸로 뭘 할까’는 아니다.

그렇다면 AI 스타트업이 어쨌든 기술이 있으니까 더 유리한가? 간단치 않다.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왜 존재하는가? 과제를 해결해야 돈을 (어떤 식으로든) 벌기 때문이다.

즉 프로덕트 중심 스타트업의 기술은 프로덕트를 지탱하기 위한 목적성을 갖고 구성된다(그게 내용적으로 적절한 기술이냐 아니냐 같은 건 다른 문제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라면? 원래 기술이 있고(…) 그 기술로 할 수 있는 마켓을 찾아서 그 마켓에 맞는 프로덕트를 만들어야 한다면? 전혀 다른 논쟁거리가 생긴다. 어떤 시장이 있는데 이걸 찌르는 뭔가를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흐름이 아니라 그냥 망치가 있으니까 이걸 갖고 돈을 벌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다.

이런 Core Tech와 시장의 불일치는 결국 고통스러운 환경을 만든다. 할 수 있는 일에는 시장이 없고, 할 수 없는 일에는 시장이 있다. 시장을 쫓아갈까? 그러면 이 회사의 경쟁력은 전혀 없고 사실상 회사조차도 아닌 아마추어다. 기술을 쫓아갈까? 그럼 누가 돈을 주나? 아무도 확답하지 못한다.

‘갑’이 되지 못하는 구조

프로덕트의 핵심은 구심력에 있다. 결국 SI 산출물과 프로덕트를 가르는 지점은 구심력이다. 그런데 구심력을 이루는 근간은 유식한 말로 PMF(Product-Market Fit)이다. 뭐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시장과 프로덕트가 핏이 얼마나 맞냐다. 프로덕트는 시장을 보고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PMF를 따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AI 스타트업의 정체성에는 프로덕트가 없고 Tech만 있다. 이 지점에서 무슨 현상이 생기는가? 프로덕트가 고객을 당겨오는 게 아니라 RAW한 기술을 고객에게 들고 가야 한다. NLP 잘한다고 하면 우리 고객 VOC로 인사이트 분석해 달라고 하고(그것도 보통은 PoC 차원에서 해달라고 한다), CV 잘한다고 하면 영상이나 이미지 가지고 뭐 해달라고 한다(이것도 PoC다). 우린 이미 이게 뭔지 알고 있다. SI. 이 시점에서 이미 우린 을이다. 일단 B2C는 물 건너 갔고, B2B가 유력한 시장이 되는데 실제로 품은 품대로 들어가고 돈 받기는 쉽지가 않다.

사실 이런 기술 세일즈는 SI로 수렴하지 않기 어려운데, 여기에 내재화 문제가 겹친다. 아무리 AI 스타트업이 도메인 특화 AI 기술을 축적하더라도, 결국 이런 것에 돈을 내줄 수 있는 고객은 언젠가는 데이터 인력을 직접 뽑아 어떤 식으로든 내재화시키게 되어 있다.

SI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것조차도 시한부라서 SM(System Maintenance) 식으로 Retainer Fee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을 거라는 건데, 이 얘기가 직격타로 이어지는 부분이 바로 IR이다. VC의 투자역 심사역이라는 분들이 따지고 보면 맨날 하시는 게 유명 기업이 트렌디한 기술 주제로 뭐 하더라 하는 얘기인데 사이즈 딱 나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결국 B2C에 대해서 손을 댈 수밖에 없어지는데..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운 조직문화

AI 스타트업(사실 테크 스타트업 전반)의 조직 밸런스를 상징하는 것은 엔지니어/리서처 퍼스트 문화다. 태생이 컴퍼니보다는 랩실같아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좀 더 가치중립적으로 얘기한다면 기술회사니까 기술자가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누가 나쁜 놈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란 것.

자, 프로덕트의 얘기로 가보자. 결국 프로덕트의 존재가치는 효용(더 쉬운 말로는 고객가치)에 있다. 예를 들어 이루다를 이루는 AI에 대해서 관심있는 사람은 막말로 VC와 대기업 전략기획팀과 데이터 인력밖에 없을 거다. 그리고 프로덕트의 고객가치를 확보하는 문제는 실전이다. B2B는 차라리 낫다. 이건 다시 한번 막말로 하면 ‘우리 회사도 AI 도입했다’ 같은 치적 남기기에 쓰일 여지가 있으니까.

그런데 B2C에선 그런 문법 안 통한다. 기술이고 나발이고 원하는 결과가 나와도 돈을 줄까 말까 하고, 아니면 안 주는 것인데.. 이걸 다 무슨 수로 이해시키냔 말이다.상대방은 NLP나 CV는 커녕 AI 하면 아 알파고요? 한다. 지도학습 비지도학습 같은 단어 나오면 B2C에선 관심도 상위 1%지. 그런데 이 사람에게 칭찬도 아닌 ‘돈’을 받아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이 상황을 돌파하는 건 단순히 말빨 갖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기술이 고객에게 친화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제에 대해서 과연 어느 AI 스타트업에서 터놓고 얘기하고 듣는 문화가 있을까? 거의 모든 AI 스타트업에서 핵심 리서처와 엔지니어는 그 자체로서 최우선 보호대상이 된다(이건 그들 개개인의 인성이나 퍼포먼스와는 별개의 문제다).

결국 모든 이슈는 세일즈/마케팅단 -> 서비스 운영단 -> 서비스 기획단 -> 비핵심 개발단 -> 경영진(경영진이 맨 우측이 아닌 경우가 꽤 많다. 이 위치가 똑바로 잡히려면 CTO의 심모원려가 정말 중요하지만 할말하않.) -> 핵심 개발단 -> 리서치단이라는 암묵적 하이어라키 안에서 좌측을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 만큼 만든 다음에서야 우측으로 이동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문제들을 같이 막아도 돌아갈까 말까인데, 실제로는 한쪽은 그런 일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한쪽은 한숨만 푹푹 쉬는 지리멸렬한 시츄에이션 그 자체다.

사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러 문제의 층위가 있다. AI적인 문제가 아닌 것, 개발적인 문제가 아닌 것, 서비스적인 문제가 아닌 것, 끝없이 파편화를 시킬 수는 없다는 것, 실제로 기술직이 HR적으로는 갑에 가깝다는 것..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것들이 전사적인 갈등을 항상 만들고 (가뜩이나 부족한) 전사적인 역량을 묶어낼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게 문제다. 프로덕트 중심 스타트업이라고 이런 현상이 없지는 않지만 정도의 차이가 크다. 비개발/비데이터/비연구직으로 AI 업계에 머무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감정 상하는 일 정말 많다. 그리고 AI 스타트업의 절대 다수는 이 문제에 대한 솔루션이 사실상 없다.

일상이 된 퀄리티 부족

스타트업의 기본기 부족은 정말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굳이 얘기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건 상수다. 이를테면 기획서를 보면 이게 낙서인지 기획인지 분간이 안되고, 개발자는 죄다 주니어라서 비즈니스 로직으로 끙끙대고 있고.. 그런데 AI 스타트업의 문제는 좀 더 심하다. 핵심 인력의 시선에 고객이 없다시피 하므로 당연히 모든 것들이 고객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 세일즈 킷 같은 회사가 돌아가기 위한 기본을 잡으려면 정말 머나먼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뿐인가? AI 스타트업은 태생적으로 통상적인 개발자와 기획자 충원 및 유지에 들어가야 할 돈 중 상당수가 AI와 데이터에 들어간다. 이 말은 곧 실제 프로덕트를 개발하기 위한 인력의 양과 질이 더욱 부족함을 의미한다. 자바 개발자 딱 한 명만 더 있다면! 리액트 한 명만 더 있다면! 화면 좀 쳐줄 사람 한 명만 더 있다면! 뭐 이렇게 한다고 없는 인력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 짜내 보지만, 결국 인력의 질과 양이 가진 한계는 넘기 힘들다.

이 문제는 회사 전체의 기본기 부족으로 이어진다. 사실상 AI/데이터 주니어 인력 몸값이 타 직군으로 치면 최소 중니어 급인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가치창출의 Depth가 안 만들어지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이 결말은 조잡한 기획안과 토이스러운 코드로 이루어진 몸이 아야한 프로덕트(라기보다는 어떤 습작)들이 N개(이게 킬링 포인트다 — AI 스타트업에게 강요되는 ‘불명확한 시장’이 가져오는 현상임) 존재하는 형태다.

고객이 기술의 경쟁력을 ‘가치’로서 체감하려면 정말 전사적인 역량이 집결되어도 될까말까 한데, 현실은 전혀 아니다. 기술은 어디까지나 기간 인프라고 실제로는 가치가 나와야 하는데, 만성적인 퀄리티 부족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어느 분야만 이런 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가 이런 상태로 흘러간다.

꿈의 종말에 대하여

대부분의 AI 스타트업은 장사를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AI 스타트업 중 상당수의 ‘장사’ 상대방은 VC나 증권사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별로 타당하게 들리진 않지만) M&A를 노리는 대기업인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런데 어쨌든 이 장사는 자본시장적인 의미의 장사지. 이제 시대가 변했고 필요한 것은 상업적인 의미의 장사다. 뭘 얼마에 가져와서(또는 만들어서) 누구한테 얼마에 팔고 얼마 챙길거냐.

AI 스타트업은 어쩌면 저금리 고유동성 시대에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현상인지도 모른다. 아무런 구체적인 아이템과 실현여부를 따지지 않고서도 수십억/수백억의 투자를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난 입사할 때만 해도 이 난장판은 투자 더 받아서 자금 좀 마련하고 정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분위기였고.

그런데 지금은 알 수 없다. 지금부터 펼쳐지고 있는 역세계화와 긴축의 시대는 좋든 싫든 스타트업이 ‘장사의 프로’여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준다. 그리고 AI 스타트업은 스타트업 씬에서도 그것과 가장 거리가 먼 회사들이었다. 몇 주 내내 설명할 수도 없는 기획자+개발자 하이브리드 짓을 하면서(뭐 내가 배운 게 이런 거밖에 없다) 많은 것들을 땜빵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건 그저 낙하속도를 늦출 뿐 종말을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을 접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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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에서 데이터 블루칼라 역할을 하는 유령